남과 북의 열린 가슴 안에 초여름 짙부른 仙景이 가득한층 여유로워진 북측 안내원, 노천온천서 바라보는 비로봉 압권

[르포] 금강산 육로 관광 2박3일
남과 북의 열린 가슴 안에 초여름 짙부른 仙景이 가득
한층 여유로워진 북측 안내원, 노천온천서 바라보는 비로봉 압권


친선대 정상에 선 문창재(왼쪽) 씨.

“여기가 군사분계선 맞아? 정말 여기가 휴전선이야?”

금강산 육로관광 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한국 관광객들은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분단 60년, 전쟁 55년의 세월을 겪으며 우리 민족 개개인의 뼈 속까지 새겨지고, 가슴과 뇌리에 쇠못처럼 박혀버린 휴전선 인식은 무엇인가.

총검과 포신이 서로의 심장을 겨눈 그곳은 서로의 눈빛까지 살펴야 하는 초긴장의 현장이라고 누구나 여겨왔다. 그러나 관광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들은 그런 고정관념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차를 타고 양측의 최전방 지대와 비무장 지대를 통과해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실현될 수 없는 일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통일에 대한 현실감이 피부에 와 닿았다. 베를린 장벽처럼 어느 날 갑자기 휴전선 철조망이 철거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6년의 세월이 가져다준 변화
6년 만에 다시 찾아간 금강산은 뇌리 깊숙이 사진 찍혀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톱날 같은 비로봉 능선이 잦아들다가 해안선에서 한번 용트림을 한 매봉을 병풍삼아, 항아리 속처럼 아늑하게 바닷물을 껴안은 고성 포구, 미인송 숲 속으로 뻗어 내린 긴 계곡 길은 외금강의 대표 경관이다.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냄새가 풍기는 관광 터미널 온정각 앞 풍경도 마치 고향마을처럼 정겨웠다. 주말마다 1,000명이 넘는 관광객으로 들끓는 그곳에는 각설이 타령으로 시끄러운 엿장수까지 등장했다. 넓은 광장과 도로변에는 금강산 관광객 100만 명 돌파를 자축하는 깃발들이 나부껴 마치 축제장에 온 기분이었다.

더 이상 남측 관광객들을 숨어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듯, 자기들 일에 열중하는 북측 주민들 모습과, 총 대신 붉은 깃발을 들고 경계근무를 서는 북한 병사들 모습, 잘 포장된 관광도로와 좋아진 시설물들은 6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변화였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북측 안내원들의 자세였다. 어딘가 여유가 있고 아량을 간직한 듯한 그들의 태도, 남측 관광객들과 서슴없이 어울리는 연출되지 않은 인간 본래의 모습을 보면서, 김일성 부자의 호칭과 ‘손가락 총질’에 온 신경을 쏟았던 6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격세지감머저 느껴졌다.

관광버스가 서울을 떠난 시간은 오전 9시. 양평- 홍천- 인제를 거쳐 진부령을 넘어, 금강산 육로관광 터미널인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 금강산 콘더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였다. 이곳에서 2박3일 동안 신분을 보장해줄 증명서인 관광증명서를 발급받고, 통일전망대 앞마당 남측 출입사무소(CIQ)에 도착해 출경(出境) 수속을 밟는다. 지정된 반(班)과 조(組)와 번호 순서에 따라 단체로 움직여야 하는 행동제약이 느슨했던 긴장의 줄을 팽팽히 당겨준다.

삼일포에서 북한 관광 안내원이 손뼉을 치며 노래 부르고 있다.

버스를 갈아타고 민통선 지역과 비무장 지대를 지날 때 가이드의 설명이 없었다면 아무도 휴전선(군사분계선)의 존재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세련된 디자인의 남측 가로등과 가드레일이 끝나는 도로변에 굵은 막대기 같은 것이 하나 서있었다. 그것이 60년 동안 민족을 갈라놓은 대립과 증오의 원점이었다.

그곳을 지나면서부터는 길가의 시설물과 구조물의 모습이 달라진다. 전차의 통행저지를 위해 세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것을 빼고는, 여기가 북측 최전방 지역인가 의심될 정도로 군사시설물도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중요 시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는 법인가. 북측 비무장 지대 도로변에서 활발하게 벌어지는 동해북부선 철도공사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요인이다.

분계선에서 잠시 달려 차가 처음 멈추는 곳은 북측 출입사무소다. 통일桓졍肉【?안쓰럽게 바라만 보던 금강산 막내 봉우리 구선봉 앞 도로변에 자리 잡은 이 시설은 남측과 마찬가지로 아직 가건물이다. 눈에 익은 정복 정모 차림의 인민군 병사가 차에 올라 빠른 눈길로 일별하면서 관광증명서의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는 검문을 받을 때부터 북녘 땅에 발을 디딘 실감을 느끼게 된다. 차를 내려 북측의 보안검사 입국심사 같은 수속을 마치기까지 남북 양측 CIQ 수속에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북측과 고성포구는 현대세상
남측과 달리 해안선에서 꽤 떨어진 들녘을 달려 고성 포구에 당도하면, 비로소 아하, 여기는 현대 세상이구나 하는 안도감을 맛보게 된다. 바다에 떠있는 호텔 해금강, 횟집 고성항, 금강산 온천장, 연유공급소(주유소), 금강산 호텔, 온천 빌리지, 금강산 팬션 같은 시설들은 새로 생긴 것들이다. 올 여름부터는 금강산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야영까지 할 수 있게 된다니 믿어지지 않는 변화다.

구룡연 코스 입구 목란관 앞 다리에서 기념촬영하는 관광객들.

숙소인 금강산 호텔 도착이 여섯시 가까워 첫날은 여장을 풀고 온천으로 긴장과 여독을 푸는 일정뿐이다. 미인송 숲 속에 자리 잡은 금강산 온천은 현대가 오랜 공사 끝에 완공한 회심의 작품답게 쾌적하고 운치가 있다. 드넓은 욕장과 훌륭한 시설도 좋지만, 비로봉 연봉을 한 눈에 조망하는 노천온천장은 두고두고 남을 추억을 만들어 준다.

욕장에서 적당히 몸을 데워 노천온천장으로 나가 길게 누우면 정면에 바라보이는 톱날이 비로봉 능선이다. 황소 잔등처럼 펑퍼짐한 능선이 오른쪽으로 잠시 꺼졌다가 가파르게 솟아오른 삼각 봉우리가 바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해발 1,638m)이다. 그렇게 기막힌 전망을 가진 곳에서 온천수가 솟아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구룡폭포, 만물상, 삼일포, 해금강 관광은 철이 바뀌면 또 다른 맛이 있다. 엊그제 내린 비로 한결 싱그러워진 ‘봉래산’ 녹음 속에 수줍게 숨어있는 옥류동과 연주담, 구룡연과 상팔담의 물빛은 옥(玉)이나 구슬(珠) 같은 색깔 이름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등산코스 요소요소에 서있는 북측 안내원들 표정과 태도가 너무 부드러워 선계(仙界) 같은 경치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명소마다 진을 치고 경관을 설명을 하는 여자 안내원들은 관광객들 요청에 따라 노래도 불렀다. 삼일포에서 만난 안내원은 ‘반갑습니다’ 끝에 재청이 나오자 남녀간의 애정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불렀다.

“금강산에서 제일가는 경치가 무언지 아십니까?” 한 안내원은 노래 끝에 이렇게 묻더니 스스로 대답했다. “바위 경치, 산 경치, 물 경치 다 좋지만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마음을 열고 마주 선 이 모습이 제일이 아닌가요.”

뛰어난 장사수단, 우리돈도 받아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관광객 주머니를 노린 그들의 장사 수완이었다. 길목마다 전을 벌이고 음료수와 과자류와 특산품을 팔면서 그들은 호객을 했다. “선생님, 시원한 사이다 잡수세요.” 달러가 없으면 우리 돈까지 받는다. 얼음에 채운 막걸리와 맥주, 한국산 소주 맥주도 있었고, 감자전과 꼬치구이 안주도 즉석에서 만들어 팔았다.

호텔 마당에서는 매일 밤 포장마차 장이 섰다. 웬만큼 매상을 올려주면 젊은 여자 ‘복무원’들의 독창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찔레~에 꽃 붉게 피~이는 남쪽나라 내 고오~향...” 뜻밖의 서비스에 환호하는 손님들에게 “오느~을도 걷는다~마는...” 앵콜곡을 선사한다.

잘 한다, 그렇게 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라, 돈이 있어야 굶주림을 면한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돌아오는 차중에서 관광객들은 자본주의를 실험하는 북한 동포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격려했다.


글·사진=문창재


입력시간 : 2005-06-30 16:59


글·사진=문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