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1차 광궤 포럼 참관기러시아 소치에서 27개국 450여 명 참가… 한국, 대륙진출 호기

▲ 최연혜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지난달 18~20일 러시아 소치에서 개최된 광궤철도 국가의 ‘전략적 파트너십 1520’ 포럼에 다녀왔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바꿔 타고 3시간 여 만에 도착한 소치는 흑해 연안에 위치한 매우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다. 대통령 별장이 있어, 푸틴 대통령이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한다. 특히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를 놓고 우리나라의 평창과 경합하고 있다.

겨울에도 영상 10℃를 유지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는 소치의 5월 날씨는 수은주가 벌써 29℃를 가리키는 초여름이었다. 흑해에서는 철 이른 피서객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지만, 도시를 에워싼 카프카즈 산봉우리는 만년설에 쌓인 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서 있었다.

올해 처음 설립된 포럼의 참가자는 27개국 450여 명. CIS국가의 철도청장들은 대부분 참석했고 표준궤국가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핀란드 철도공사 사장, 그리고 한국철도를 대표해서 내가 참석했다.

포럼은 3박4일간 진행되었고 철도현대화 및 구조조정, 기술적 문제, 인사관리 등 여러 철도 현안을 다루었다.

한반도·유럽 잇는 철의 실크로드에 관심

첫날 기조연설에서 나는 남북철도의 연결은 곧 대륙철도와의 연결을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광궤철도 국가들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한국은 TKR(한반도 종단철도)-TSR(시베리아 횡단철도) 등 유라시아 철도네트워크를 ‘철의 실크로드’라고 칭한다며, 여기에는 1,000년 전의 실크로드가 그러했듯 유라시아 대륙철도가 동서양의 만남과 교류의 통로로서 인접국가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소개해 호응을 얻었다.

남북철도의 시험운행에 대해서도 많은 참석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둘째 날에 나는 야쿠닌 사장의 특별 초청으로 러시아 철도공사 간부들과 함께 예정에 없던 터널 개통식을 참관했다.

선로점검용 동차에 특별객차를 연결한 열차를 타고 약 2시간 반을 달려 소치에서 143 Km 떨어진 북부 카프카즈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 가는 길의 선로는 단선과 복선이 혼재돼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은 복선으로, 외곽지역은 단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차설비는 건설된 지 오래된 때문인지 아주 엉성해 전주의 경간이 촘촘하고 전차선의 장력추에 큰 돌을 얹어 놓은 곳이 보일 정도였다. 아직도 3,000 볼트 직류 구간이 많이 남아 있어 속도 향상을 위해 전차선 개량공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사조노프 부사장은 말했다.

기존 터널은 급곡선 구조라서 열차 증설은 불가능해 급증하는 여객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 터널 건설이 필요하다고 한다. 길이 1,015m로 2년 반 만에 건설한 볼쇼이환상터널은 오스트리아에서 도입한 굴착공법을 사용했다고 강조했다.

광궤철도인들의 네트워크 증진에도 목적을 두고 있는 이번 포럼에서 매일 저녁 마련된 흥겨운 파티는 중요 행사의 하나였다.

파티는 참가자들 간에 자유로운 만남과 친밀감을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 세심한 배려로 보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포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 중 하나가 서방 철도관련기업들이 대거 참여하여 세일즈를 하는 모습이었다.

건설한 지 오래되어 낡은 철도시설의 개량과 호황으로 신규 차량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CIS 국가의 교통부장관이나 철도청장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인 이번 포럼은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돈 주고도 사기 어려운 호기였을 것이다.

건설회사들은 물론이려니와 물류회사, 컨설팅회사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특히 세계 3대 철도차량 제작사인 봄바디어, 알스톰, 지멘스의 최고경영자들이 몸소 참여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CIS 국가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철도공사는 포럼 기간 중에 독일 지멘스와 고속철도차량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다면 러시아철도공사가 이번 포럼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목부터 ‘Strategic Partnership 1520’을 달고 있는 이번 포럼을 일관되게 관통한 키워드는 ‘통합’이었다.

야쿠닌 사장은 개막 연설부터, 언론과의 인터뷰, 또는 다른 발언들에서 ‘Integratia’ 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했다. 러시아 정가의 숨은 실력자, 차기 대통령후보 1순위자로 인정되는 실세인 야쿠닌 사장이 광궤 포럼을 소집하여 Integratia를 강조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1991년 12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독립국가연합이 결성되었으니 소련이 해체된 지 올해로 15년이 된다.

옐친 대통령이 소련의 해체에 성공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고통도 안겨주었다. 다른 나라들이 앞다퉈 경제 성장을 일궈낸 지난 15년 동안 러시아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만큼 경제위기도 겪었고 2005년에야 1991년의 GDP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1, 2위를 다투는 산유국으로 고유가 환경에다 인공위성을 제작할 만큼 기초과학 분야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저력을 갖춘 러시아는 이제 과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가도에 시동을 걸었다.

이처럼 고도성장의 출발선에 선 러시아 지도층의 당면한 고민은 무엇보다 러시아 국민, 나아가서 CIS 구성원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재건하는 것이다.

▲ 러시아 카프카즈 지역의 내륙선로(사진 위)와 포럼에서 러시아 정계의 숨은 실력자 야쿠닌(오른쪽) 사장 등과 환담을 나누는 최연해(가운데) 부사장.

내가 주코프 러시아 부총리, 바라비요프 북카프카즈 지방철도청장, 글라드카흐 우크라이나 및 제렐로 벨로루시 철도청장과 만찬을 하였을 때도, 야쿠닌 사장은 ‘이 자리에는 3명의 외국인과 3명의 내국인이 있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유머로 말문을 열었다.

즉,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가 이제는 독립국가로서 독자적 길을 가고 있지만 ‘우리가 남이가?’ 라는 정서를 건드리며 역으로 친밀감을 강조한 말이었다. 즉 새로운 질서의 모색과정에서 어쩌면 러시아인들은 대제국을 형성했던 소비에트라는 ‘영광스런’ 과거에 대한 향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오늘날 러시아가 안고 있는 고민은 러시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글로벌경제 체제가 확산되면서 국경의 의미가 퇴색하고 세계 각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 질서의 해체를 경험해 왔다.

더 큰 자유와 경제적 부의 창출이 가능해진 반면 익숙한 관행과 질서의 해체로 인한 혼란에 직면하면서 많은 나라들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 새로운 질서와 아이덴티티에 대한 희구가 대두되고 있고 이러한 갈망들을 담아낼 수 있는 ‘통합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1세기 글로벌 협력 모델로 등장한 철도

이러한 배경에서 국경을 넘어 대륙을 통합하고, 인접국가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협력체계를 가능케 해주는 철도가 21세기의 글로벌협력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통합철도망을 통해 유럽대륙의 물리적 통합을 추구하고 있으며, 21세기 다시 ‘중화의 비전’을 꿈꾸는 중국 또한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대역사로 일컬어지는 1,142km의 칭장(靑藏) 철도를 건설하였고 2020년까지 10만 Km의 현대화된 철도망을 건설한다는 목표로 철도건설에 열을 올리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이다.

특히 중국이 범아시아철도망 (Trans Asia Railway) 계획을 통해 CIS의 일원이며 광궤국가인 카자흐스탄의 철도를 표준궤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러시아를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남북철도가 연결되면 중국, 만주, 러시아와 유럽대륙에 이르는 대륙물류시스템의 시종착지로서 물류거점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과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사실상 유라시아 대륙의 인접 국가들이 추구하는 글로벌협력 모델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겠다.

2년 전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통합한 한국철도가 진정한 대륙철도 시대의 주인공이 될지 시험대에 올라 있는 셈이다.

‘제1차 광궤철도국가의 1520 포럼’에서 해체와 분열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는 러시아의 고민과 이러한 과정에서 철도가 구소련의 광대한 영토까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통합의 주체로 비상하는 날갯짓을 생생히 보고 왔다.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한국이 뭘 해야 할지 숙제를 본 포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적으로 남북철도 연결은 우리 민족의 웅비를 위한 중요한 첫발이라고 생각한다.


최연혜 한국철도공사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