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계기 다시 주목… 당시 알리바이 완벽해 용의자 풀려나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영화 ‘그놈 목소리’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미 공소 시효가 지난 이형호 군 유괴사건에 다시금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화 제작진이 ‘미아ㆍ실종가족찾기모임’과 함께 만든 온라인 수사본부(http://www.wanted1991.org)에는 연일 신고가 폭주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접수된 200여 건의 제보 중 신빙성이 있는 18건은 서울 강남경찰서에 전달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16년이나 시간이 흐른 사건의 범인을 ‘목소리’라는 증거로 잡을 수 있을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음성연구실 김태훈 실장을 만나 음성 분석의 과학성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이형호 군 유괴사건의 ‘그놈 목소리’를 둘러싼 의혹을 재추적해봤다.

▦ 사람마다 다른 성문은 제2의 지문

음성의 성문(聲紋)분석은 유괴범이나 협박범 수사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사람은 각기 다른 음성기관, 언어 습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마다 독특한 음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이 사람마다 다른 음성 파동을 지문처럼 무늬로 시각화하여 식별하는 것이 성문 분석의 원리다.

성문 분석을 통해 조사가 가능한 것은 공명주파수와 주파수별 세기, 성대 진동 형태 및 음의 높이, 억양, 발음지속 시간, 자음 스펙트럼과 음의 세기 변화 형태 등 음성기관과 발음상의 특징들이다. 이를 토대로 비교 분석한 결과를 통해 동일인 여부를 가려내게 된다.

성문분석 전문가들은 이형호 군 유괴사건 당시 “범인의 음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판독ㆍ의뢰해 용의자 2명이 범인의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일부 보도는 한마디로 ‘오보’라고 일축한다. 성문 분석은 목소리가 비슷한 인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태훈 실장은 “성문 분석을 통한 개인 식별(화자 확인)은 범인의 음성과 용의자의 음성이 비슷하거나 같은지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두 음성이 동일인의 것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라며 “성문 분석은 지문과 치아 감정 등과 유사하게 얼굴 없는 범인을 찾아내는 데 중요한 식별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국과수, 87년부터 공개 수사에 활용

국내에서 범죄사건과 관련해 성문 분석 방법을 처음 도입한 것은 1987년. 70년대부터 음성에 의한 개인 식별 연구를 시작해오다 성문분석기 등 신형장비가 들어오고 음성 분석 결과에 대한 신뢰가 확인되면서 87년 7월부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범죄사건 수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개인 식별, 녹음테이프의 인위적 편집 여부, 녹취록 내용 확인, 잡음 제거 및 음질 개선 등 음성음향학적 분야에 관련된 업무를 두루 수행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음성연구실 업무의 절반 이상은 바로 이 음성에 의한 개인 식별(화자 식별)이다. 수많은 음성 DB속에서 범인의 음성과 용의자의 음성을 대조하여 동일인 여부를 밝혀낸다. 해마다 수천 종에 달하는 용의자 목소리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경찰이 성문 분석으로 해결한 대표적인 사건은 88년 원혜준 양 유괴사건의 범인을 검거한 것. 경찰은 녹음된 범인의 음성과 비슷한 50여 명의 대한 음성 분석을 실시, 동일인의 음성으로 확인된 용의자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는데 성공했다.

음성에 의한 분석 결과가 틀릴 확률은 10만분의 1정도로 99% 이상의 정확도를 가진다. 미국 FBI통계에 따르면 86년 2,000건의 성문분석 결과, 판정이 잘못된 경우는 단 3건일 정도로 신뢰도가 높고, 그 오류 또한 일란성 쌍둥이나 형제 등의 경우로 성문의 차이가 거의 없는 매우 특수한 경우에 국한되었다.

국과수 물리분석과 음성연구실 김태훈 실장.
▦ "시간 흘러도 성문으로 범인 규명 가능"

이형호 군 사건의 범인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전문가들은 범인이 서울, 경기 지역 출신이며, 고졸 이상의 학력을 지닌 지능범으로 추정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형호 군 유괴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직후 이미 범인의 성문과 일치하는 용의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군의 외가 친척인 이모(당시 29세) 씨다.

그러나 이 씨는 협박전화 음성과 성문이 일치했음에도 알리바이가 입증돼 풀려났다.

경찰은 유력 용의자인 이 씨가 ▲이군 부모의 이혼과정에 개입해 감정이 좋지 않았고 ▲당시 사업 부도로 돈이 급히 필요한 정황이었고 ▲알리바이가 입증됐음에도 그 알리바이가 너무 완벽해 조작 의혹이 있다는 점(이 씨가 다른 날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부산과 경주에 가 있었다는 사건 발생 시의 행적만은 소상히 기억하고, 입장권과 주차권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 등에서 재수사를 실시하고, 시민 제보를 받기도 했으나 범인임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는 물론, 공범 여부조차 캐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미 동일인으로 밝혀진 인물이 있는데, 음성 분석으로 동일인 판정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두 명의 성문이 같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김태훈 실장은 “2명이 동일인 판정을 받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혹여 당시의 판정이 오류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범인의 목소리 자료가 단 한 마디에 불과했다면 모를까 범인의 전화가 46차례나 걸려와 분석 자료가 충분했고, 수십 개의 단서를 종합해 판단을 내린 결과였으며, 단서 중 단 하나라도 상이한 결과가 있으면 동일인이라고 판정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일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세월이 무수히 흐른 뒤에라도 음성 분석으로 범인을 밝혀낼 순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고 한다. 김 실장은 “성문은 지문처럼 고유한 특징이 있어 범인 목소리가 남아 있는 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음성 분석의 태동과 역사
1930년대 과학적 연구시작… 話者 식별 정확도 99%

음성이 범인을 식별하는 단서로 처음 이용된 것은 1660년 영국의 찰스 1세의 죽음에 관계된 재판이었다고 한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용의자 음성과 머릿 속에 기억하고 있는 범인 음성과 동일인의 음성인지를 확인하도록 했다.

이후 1937년 비행기로 대서양 횡단에 처음으로 성공한 린드버그의 자식이 유괴돼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고, 음성을 듣고 범인을 확인하는 방법의 신뢰성이 처음으로 문제시되면서 음성의 개인성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세계 2차 대전 중 미 육군에서는 목소리 식별이 하나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들은 적의 무전병 목소리를 분석함으로써 무전병이 소속된 부대의 이동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판단해 연구 과제를 벨 연구소에 맡겼으나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연구는 중단됐다. 그러나 60년대 들어서면서 비행기 납치, 폭발물 협박, 유괴, 공갈 사건 등으로 항공사 및 수사기관이 많은 애로을 겪게 되자 FBI는 음성에 의한 개인 식별에 관한 연구를 다시 벨 연구소에 의뢰했다.

62년 이 연구소의 커스타(Kersta) 연구원이 화자 식별을 시행했고, 실험 결과 성문은 사람의 지문처럼 누구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의한 화자 식별의 정확도는 99%이상이라고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이후 경찰의 범죄연구소들은 음성으로 범인을 식별할 수 있다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미 법무성의 지원으로 68년부터 70년까지 실시된 미시간주립대학 음성 식별 프로젝트에서 실험실 조건뿐 아니라 실제 사건과 유사한 환경에서도 성문에 의한 화자 식별은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판명됐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