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재한 영웅들… 산 앞에서는 청춘한국 산악계의 대들보… 등정 30주년 기념원정대와 함께 장도에 올라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1977년 9월 15일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산 정상을 밟은 사람은 고(故) 고상돈 대원 한 명이었다. 그는 스물아홉 살의 젊은 무명 산악인에서 일약 국민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위업을 그 혼자 해낸 것만은 아니다. 19명 원정대원 모두의 땀과 노력, 희생이라는 계단을 밟고 올라간 정상이었다. 그래서 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모두가 영웅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그들이 30년 만에 다시 뭉쳐 3월 31일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첫 등정 30주년을 기념해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선 박영석 원정대와 함께 세월을 건너뛴 우정의 동반 등반에 나선 것이다. 물론 정상 공격은 힘에 부쳐 후배들의 몫으로 돌렸다. 하지만 5,000m가 넘는 고지대에 차려질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하며 후배들에게 기를 듬뿍 불어넣어줄 요량이다.

77년 원정대원들은 이제 대부분 60대 안팎의 노병이 됐다. 김영도 원정대장은 팔순의 고령이다. 한때 혈기가 하늘을 찔렀던 젊은 영웅들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60대 안팎의 노병 11명 참가

원정대원 중 고상돈 대원 등 3명이 이미 세상을 등졌고 4명은 해외에서 살고 있다. 이번 30주년 기념 원정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빠진 1명을 제외한 11명 전원이 동참했다.

이들은 에베레스트 정상을 내려온 뒤에도 한국 산악계 발전을 위해 묵묵히 많은 기여를 해왔다. 국회의원이자 대한산악연맹(대산련) 회장으로 원정대를 인솔했던 ‘캡틴’ 김영도(83) 대장은 그 다음해인 78년 그린란드 탐험에 나서 북위 80도까지 진출했다. 한국인 최초의 북극권 원정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산악계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금배지를 내려놓은 78년 곧바로 등산연구소를 개설, 해외 등산정보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직접 저술했거나 번역한 책만 해도 15권에 이른다. 기업체 연수나 등산학교에 단골연사로 초빙돼 20년 가량 강의도 했다. 이 같은 그의 노력은 이론적 배경이 부족한 국내 산악계에 든든한 길잡이가 돼줬다.

고 고상돈 대원이 77년 9월 15일 12시50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감격적인 소식을 전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 대장은 지금도 77년 원정대의 정신적 지주다. 팔순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정정한데 그 비결은 ‘정신적으로 젊게 살며, 과욕을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높은 곳을 향해 가는 등산은 인생과 똑같다. 중요한 것은 ‘고도’보다는 ‘태도’를 품격 있게 높이는 것”이라며 대가다운 등산론을 밝혔다.

77년 원정대에는 의사도 한 명 포함돼 있다. 조대행(61) 가톨릭대 의과대 비뇨기과 교수가 주인공. 하지만 그는 단순한 ‘팀닥터’가 아니라 엄연한 대원으로 동참했다. 그 역시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산악부를 거친 산악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원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은 김영도 대장이 “의사이면서 대원으로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가자”는 제안을 낸 덕분이었다.

당시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었던 조 교수는 국방부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원정대에 합류, 동료들의 건강을 챙기는 중책을 수행하면서도 7,800m까지 산소통을 쓰지 않고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국내 귀환 이후에도 산악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대산련 이사 및 학술편집위원장, 서울시산악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고 지난 3월 초에는 대산련 부회장을 맡았다. 모 기업체가 주관하는 등산학교에서 등산, 조난 관련 강의를 해온 지도 벌써 23년이나 됐다.

90년대 초반 미국 연수기간 동안 암벽 등반에 푹 빠지기도 했던 조 교수는 요즘에는 또 빙벽 타기에 재미를 붙였다. 매년 여름 일본 북알프스(3,190m)에 오르는 것도 빼놓지 않는 연례행사다.

조 교수는 “산에 빠져 살다 보니 산악 관련 논문은 많이 썼는데 정작 비뇨기과학회지에는 (의학 논문을) 별로 내지 못했네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병준(58) 대산련 감사는 한국 산악계의 살림꾼으로 오랫동안 봉사해온 케이스다. 그에 따르면 77년 원정대원들은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대산련이나 각 시도산악연맹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우리나라 산악계 발전에 큰 디딤돌이 됐다. 현재는 대부분 일선에서 은퇴한 상황.

"마지막은 없다, 다음에도 갈거니까"

김 감사는 77년 이후로도 해외 원정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86년 케이투(세계 제2의 고봉ㆍ8,611m) 원정대를 이끈 것을 비롯해 10여 차례나 대장 혹은 대원으로 세계 오지를 누볐다. 가장 최근에는 2004년 히말라야 알룽캉(8,505m)봉을 다녀왔다. 그는 그게 마지막이었냐는 질문에는 “마지막은 없다. 다음에도 갈 거니까”라고 답변했다.

77년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에 다녀온 뒤로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꼭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물론 만났다 하면 산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함께 일정을 맞춰 종종 산행에 나서기도 한다.

산에 살고 산에 죽는 진정한 산사나이들. 그들의 우정은 30년의 세월 속에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욱 농익어 간다. 억겁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웅장함을 간직한 저 넉넉한 명산(名山)들처럼.


77원정대 홍일점 명예대원 한희수씨 "30년 전 남편과의 약속지켜"

77년 원정대의 이번 에베레스트 원정에는 30년 전에는 없었던 ‘홍일점 명예대원’이 한 명 동참한다. 김명수(63) 대원의 아내인 한희수(60) 씨가 주인공이다.

“30년 전 남편이 에베레스트에 간다고 했을 때는 어떻게든 뜯어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워낙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떠나기 일주일 전쯤 되니까 자기가 오히려 불안해 하더라고요. 해서 ‘나는 두 번 시집 갈 팔자가 아니니까 안심하고 갔다오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었죠.”

김 대원은 아내의 격려와 기도 덕분에 아무 탈 없이 돌아왔다. 그리곤 “산이 너무 아름답더라. 다음에 꼭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많이 늦어졌지만 그 약속을 꼭 30년 만에 지키게 됐다. 올해는 아내의 환갑이어서 더욱 뜻 깊은 등반이 될 듯하다.

한 씨는 결혼하기 전에는 산을 전혀 몰랐지만 평생 남편을 따라다니다 스스로 산사람이 됐다. 4,000m 고봉에도 올라봤을 만큼 상당한 등산 실력의 소유자다.

현재 경기 용인 교동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한 씨는 교육자답게 “에베레스트에 다녀와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과 교훈을 전해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