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가상현실 속 또다른 삶 열풍자신이 꿈꾸는 모든 일에 무한의 권능 누릴 수 있는 3D 온라인 커뮤니티사이버머니 거래로 실제로 부자되기도, 국내 대기업 시장 가능성 주목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회사원이다. 그의 집과 직장, 그리고 길거리의 풍경은 여느 도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에 의해 정교하게 꾸며진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충격적 진실에 직면하게 되는데….

영화 <매트릭스>는 실제의 세계와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네오와 동료들의 SF 영웅담이다.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은 단지 화려한 컴퓨터그래픽과 탄탄한 시나리오뿐 아니라, ‘현실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철학적 논제를 사람들에게 던졌다는 점이다.

과연 현실은 무엇인가. 과학적으로는 어떤 존재가 실재(實在)하는 곳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것’을 곧 ‘현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낳는다. 가상현실이라는 것도 그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매트릭스>의 고향 미국에서는 지금 인터넷상에 구축된 가상현실 사이트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매트릭스>가 구현하는 것처럼 정말 실제 같지는 않지만 3차원(3D) 화면으로 만들어진 이 가상현실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그 열풍은 미국을 벗어나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 사용자들이 참여해 창조하는 가상세계

우리말로 ‘또 다른 삶’, ‘제2의 세계’ 정도로 부를 수 있는 세컨드라이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정보기술 업체인 린든랩이 2003년 인터넷에 선보인 3D 온라인 가상현실 커뮤니티다.

여기에 접속한 사용자는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를 만들어 활동하게 되는데 집을 짓고 물건을 사고 팔며 다른 아바타들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언뜻 3D 온라인 게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일정한 룰에 따라 승부를 가리지 않고 아바타 스스로 자유롭게 뭔가를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게임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히려 그보다는 모든 질서가 현실 세계와 무척 닮아 있다. 린든랩 측의 설명에 따르면 세컨드라이프는 ‘전적으로 사용자가 창조하고 참여하면서 이뤄지는 영속적인 온라인 가상세계’다.

사용자는 세컨드라이프 속에서 자신이 상상하는 인물을 창조하거나 스스로 그 인물이 될 수 있다. 아바타는 사용자의 기호에 따라 매우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 꾸밀 수 있다. 세상에 ‘나’는 하나밖에 없듯이.

아울러 사용자는 세컨드라이프에서 자신이 꿈꾸는 모든 일을 펼칠 수 있다. 빌딩이나 상품을 만들어 팔 수도 있고 세계 여행을 다닐 수도 있다. 친구나 애인을 사귀는 것은 물론 마음만 맞으면 사이버섹스도 할 수 있다. 이는 세컨드라이프 안에 설치돼 있는 콘텐츠 개발 도구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사용자는 가상현실 속에서 창조주와 같은 권능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컨드라이프에 열광하는 것도 바로 그런 특성, 즉 말 그대로 현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도 실현시킬 수 있는 자유공간이기 때문이다.

세컨드라이프는 실제 세계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장 원리에 따라 돌아간다. 사용자들은 공식 통화인 ‘린든 달러’를 가지고 교환, 매매, 자본 증식 등 경제활동을 한다. 린든 달러는 달러화로 환전되며 환율도 고시된다. 세컨드라이프에서 돈을 벌면 현실에서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660만 명에 달하는 세컨드라이프 주민 가운데 월 5,000달러 이상의 수입을 버는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

그중에는 10달러 정도를 들여 세컨드라이프에 둥지를 튼 뒤 부동산 사업을 벌여 2년여 만에 100만 달러가 넘는 누적 수입을 벌어들인 독일 여성이 세컨드라이프 최고의 갑부로 알려졌다. 올해 세컨드라이프의 총 생산규모(GDP)는 약 1억 5,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 기업, 정치인들도 상륙 깃발 러시

세컨드라이프가 점차 현실 세계와 닮아가면서 그 잠재력을 실감한 사용자들이 기회의 땅으로 몰려들고 있다. 아울러 사람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기업과 학교, 정치인들도 깃발을 꽂고 있다.

IBM,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델, 도요타, 소니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이미 사이버 지점을 개설한 데 이어 하버드, 스탠퍼드대 등 미국 명문대들도 세컨드라이프에 캠퍼스를 열었다.

미국 유력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힐러리 클린턴 등 대권 후보들은 일찌감치 사이버 대선 캠프를 차려놓고 활발하게 유세를 벌이고 있다.

이런 바람은 지구촌으로도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스웨덴, 몰디브 등은 최근 세컨드라이프에 대사관을 열어 사이버 외교, 국가홍보 활동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계획을 밝혀 주목을 받았다. 로이터 통신은 세컨드라이프에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전담기자를 둬 취재활동도 벌이고 있다.

국내에서는 삼성 등 일부 대기업이 세컨드라이프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으며 일부 대학과 종교단체 등도 진출을 타진하고 있거나 이미 진출한 상태다. 현재 세컨드라이프에 둥지를 튼 한국인은 약 2만 명 정도. 린든랩은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 본격 진출을 목표로 최근 한국어판 세컨드라이프 공식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시험 서비스는 지금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세컨드라이프를 두고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커뮤니티냐 게임이냐는 등의 정체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대표적인 예다. 성격이 다소 모호해 한국 네티즌들의 정서와 맞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게다가 린든 달러라는 사이버머니가 거래되는 데다 사이버섹스, 카지노 등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는 부분을 담고 있는 점도 논란거리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세컨드라이프가 커뮤니티, 게임, 온라인 쇼핑몰 등 기존의 개별적인 인터넷 서비스 성격을 모두 아우르는 혁신적인 개념의 서비스라며 새로운 시각의 접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얼마 전 3D가 인터넷의 미래가 될 것이라며 세컨드라이프처럼 최근 등장하는 3D 서비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노무라종합연구소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는 가상현실 서비스의 여명기로 2010년께면 기업과 개인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작 가상현실 신드롬을 불러온 린든랩 측은 세컨드라이프의 미래에 대해 이념이나 방향 같은 것은 없다고 밝힌다. 세컨드라이프는 단지 창조적인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공공 놀이터’만을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세컨드라이프 한국 홍보 관계자는 “린든랩은 세컨드라이프를 3차원 인터넷으로 들어가는 플랫폼으로 규정한다”며 “때문에 회사의 가장 큰 목표는 세컨드라이프가 보다 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기술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나머지, 즉 세컨드라이프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사용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비록 가상현실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세컨드라이프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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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