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가정 파탄범 소리없는 가정일조량 적은 겨울철에 더 위험… 가족의 연쇄 우울증 유발시키기도

"만사가 귀찮다" 전신피로·의욕 저하로 대인 기피
일상적 게으름과 큰 차이없어 방치·악화 되기도
취업난·학업스트레스로 발병 연령 점점 낮아져

50대 부부 J씨와 L씨는 지난해 이혼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극적으로 파경을 면했다.

남편 J씨측에서 먼저 요구한 이혼 사유는 부인 L씨의 ‘지나친 가사 소홀’이었다.

3년 전 어느 날부터인가 J씨가 퇴근해보면 집안엔 아침에 놓여있던 빨랫감들이 그대로 쌓여있고, 청소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있다가 남편이 들어서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저녁식사 준비를 하던 부인 L씨.

처음엔 잠깐의 감기몸살로 생각했던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J씨는 점점 더 ‘게을러’졌다. 남편의 출장 때는 아예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밖에서 저녁을 사먹고 오게 했다. 보다 못한 남편과 점점 언쟁이 잦아졌고, L씨는 L씨대로 ‘온 몸이 무겁고, 만사가 다 귀찮다.

피곤하니 나를 제발 가만 내버려두라’며 거친 대꾸로 맞섰다. 지저분한 집안 꼴을 보기 싫다며 J씨는 외박까지 하며 아내에게 시위했지만 집안은 점점 더 어질러지고 걸핏하면 다투는 부모 곁에서 아이들까지 침울해졌다.

참다 못한 남편쪽에서 이혼을 결심, 뒤늦게 이 상황을 알게 된 한 주변 친지의 권유로 이혼 전 ‘마지막’ 확인 삼아 병원을 찾았다가 부인 L씨의 증세가 우울증임을 진단받았다. 현재 L씨는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과 배려 아래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점차 호전되고 있다.

50대 후반의 택시기사 N씨는 집안에서 ‘빈둥대는’ 아들 때문에 속을 썩히다 한때 우울증 치료까지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취업도 않고 온종일 집에 틀어박힌 채 드러누운 꼴이 한심해 마주칠 때마다 절로 화가 치솟곤 했다. 한마디 호통이라도 칠라치면 아들은 더 심하게 반발하며 제 방 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았다.

둘 중 하나라도 온전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아들에게 따로 방을 얻어 내 보내고 난 뒤에야 우울증이 조금씩 호전됐다. 의사와의 상담 중 권유를 받고 아들에게도 정신과상담을 받게 한 결과, 아들 역시 우울증 증세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중 일조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겨울철, 무기력증에 대한 비상경계령이 떨어졌다. 환절기마다 잠깐씩 스쳐가는 일회적 무기력감이 아닌, 우울증의 전조 또는 동반 증상의 무기력증 환자가 부쩍 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울증의 증상과는 달리 별다른 우울감 없이 발병하기 때문에 주위 가족은 물론 당사자조차 이유도 모른 채 시달릴 수 있는 증상이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전체적으로 인구의 약 10~20%가 평생 한번 이상 우울증을 겪는다는 통계보고가 있고, 그 중에서도 여성의 경우는 남성에 비해 2배에 이른다”며 “실제로 무기력증을 동반한 우울증 문제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 수도 눈에 띄게 급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우울증에 대한 의학계의 홍보와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를 감추거나 혼자 참지 않고 적극적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와 특히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사회생존의 스트레스가 심화되면서 이로 인한 압박과 좌절감 등 사회환경 변화에 따른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 경우 등이다.

그 중에서도 문제시 되는 것은 우울증의 초기 증세 또는 동반 증상로서의 무기력증. 이는 ‘일상생활이나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될 경우’로 의학계는 정의하고 있다.

대개 전신의 피로감과 함께 흥미나 의욕, 집중력의 저하, 내내 기분이 가라 앉은 증세로 나타난다.

걸려오는 전화나 대인 관계 등 외부와의 관계조차 스스로 차단, 일상적인 모든 일들에 흥미를 잃은 채 피하기도 한다. 팔다리가 무겁다거나 갑작스런 식욕의 변화(식욕저하 또는 식욕과다), 잠의 변화(과면증 또는 불면증) 등의 증세도 수반된다.

외형상으로는 ‘게으르고 불성실한’ 정도의 일상적인 게으름과 별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정신과적 치료를 요하는 심각한 우울증 초기 증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방치되거나 악화되기 쉬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심할 경우 가족들로부터 오히려 ‘낙오자’ 취급을 받으며 핀잔을 듣는 등 더 나쁜 환경을 맞을 수도 있다.

특히 이맘때인 1~2월은 우울증성 무기력증 환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다. 1차적으로 일조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조량이 적은 북유럽 국가들에서 우울증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이미 의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 겨울을 맞아 맑은 날이 많이 줄어들면서 무기력증 및 우울증을 악화시킨다.

한림의대 정신과 전덕인 교수는 “외부적인 자극이 적은 것도 악순환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울증성 무기력증의 경우 스스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고 전화도 피하며, 전반적으로 소리나 시각적인 자극 등이 줄어들게 되면서 증세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을 비롯, 주변 사람들이 이를 우울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대로 방치될 경우 환자는 점점 더 자신을 가정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며 안으로 침잠시키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가벼운 우울증 초기 단계에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물론, ‘나태하다’는 오해와 함께 전체 가족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가정의 불화를 부를 수 있다. 동시에 이로 인한 또 다른 가족의 연쇄 우울증을 유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약 6개월간 무기력증을 겪다가 친구의 권유로 병원을 찾아 현재 1달째 치료를 받고 있는 20대 후반 여성 K씨의 고백.

“내 자신도 괴롭고 힘든데 가족들마저 ‘그렇게 잠만 자니 더 늘어지는 것’이라며 한심해하거나 ‘방에만 박혀있지 말고 바깥에 좀 나가라’고 짜증을 낼 때 너무 화가 나고 세상이 싫어졌다. 뒤늦게 친구의 도움으로 함께 병원에 갔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땐 차라리 피를 나눈 가족들보다 친구가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독신자의 경우는 특히 치료환경상 어려움이 더 크다. 무기력증의 경우 본인의 의지가 심하게 약화된 상태이므로 가족 등 주위 사람들의 발견과 도움이 절실한 질환이다. 이 점에서 홀로 생활하는 독신자의 경우 무방비상태로 소리 없이 증세가 계속 진행되거나 악화될 수 있다.

만성형 무기력증은 특히 일반인들이 속기 쉬운 요주의 대상이다. 더 심해지거나 더 호전됨도 없이 일정 수준의 증세 그대로 몇 년씩 균일하게 진행되는 독특한 케이스다. 이것 역시 우울증에 해당되는 유형이다.

최근에는 무기력증이 발병하는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취업난으로 인한 불안과 좌절감 등 20대의 발병률이 높아진 것은 물론, 학업 문제로 시달리는 중고등학생들이 늘면서 이들에게까지 증세가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 어디랄 것 없이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학생들의 질문과 댓글이 날마다 늘어나는 상태.

유명 고급 학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경우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 청소년층만 전문으로 돌보는 정신건강 클리닉도 대폭 증가, 중고생 환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발견과 인식이 어려울 뿐 치료는 의외로 간단하고도 효과가 높다. 처음으로 무기력증이 나타난 환자의 경우 70~80%는 약물치료만으로도 바로 증세가 호전된다. 이와 정신치료를 병행, 대략 3~4주면 치료가 끝나고 원래의 활기와 의욕이 되살아난다.

약물요법으로는 프로작 등 주로 항우울제를 이용한 처방이 이용되고, 부작용도 거의 없다. 단, 쉽게 호전되기는 하지만 재발 가능성 또한 높으므로 당장 효과가 있다고 해서 너무 일찍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신과 전문의와의 상담에 따라 치료 기간을 충분히 가지고 진료받는 것이 장기적으로 안전하다.

의사의 역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환자가족의 태도다.

한림의대 정신과 전덕인 교수는 “장기간 무기력증세를 보이는 가족이 있을 경우, 다른 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증세가 아닌 한 제 때 적절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가족들이 앞서서 이끌어주고 치료과정 내내 옆에서 격려하며 배려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 단순히 ‘힘내라’라는 식의 말은 환자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본인도 힘을 내고 싶은데 힘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정신과적인 무기력증의 경우, 상대가 힘들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그대로 인정해주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힘내라며 외출을 강요하거나 강제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무기력증에서 우울증으로 발전된 뒤 현재 치료를 받고 있는 한 환자는 “우울증보다 무기력증이 더 무섭다”고도 말한다.

우울증은 비교적 뚜렷한 특징에다 빠르게 대처라도 할 수 있지만 무기력증은 별 두드러진 표시도 없이 ‘은근히, 그리고 홀로, 길게’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무기력증은 환자 개인 뿐 아니라 가족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때다. 무심하게 방치될 경우, 가정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무기력한 가정과 사회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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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