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45) 전혁림 미술관 전영근 관장'구십현역' 전혁림 화백 아들로 미술관 운영하며 부친 작품활동 보좌아버지 영향받아 자연스레 화가 입문, 작년 미국서 초청전시회 열기도

(사진 우측) 전혁림 미술관 전경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경상남도 통영시. 그곳 미륵산 자락에 위치한 ‘전혁림 미술관’은 미술관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전혁림(95) 화백과 그의 아들 전영근(53) 화백의 그림이 나란히 그려진 세라믹 아트타일 7,500장이 건물의 하얀 바탕 외벽을 화려하게 빛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3층 전시실 외벽에는 전혁림 화백의 1998년작 <창(Window)>을 재구성한 대형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눈앞에 코발트 빛 블루의 바다가 넘실댈 것만 같은 이 미술관은 눈부신 지중해의 궁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국에서 평생을 화가로 살면 나이가 들수록 존중도 받아야 하는데 70세가 넘으면 점점 화단에서 잊혀져 가는 경우가 많지요. 아버님의 경우 예순이 넘으면서 중앙화단으로부터 재평가를 받기 시작해 오히려 왕성한 활동을 하신 대기만성형이랄까. 좀 예외적인 분이세요. 지역에서 화가로 활동하면서 혹여 슬럼프에 빠지실까, 작품 활동하는 데 도움도 드릴 겸 살아계실 때 아버지 이름의 미술관을 꼭 지어드리고 싶었어요.”

전혁림 미술관은 30여 년간 살아온 집을 헐고 그 터에 2003년 5월 새로 개관한 시설이다. 1층 작업실은 전 화백이 95세의 고령에도 창작열을 불태우는 현장이다. 하얀 백발의 화백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본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붓을 들고서 캔버스를 향한 그의 손은 청년작가 부럽지 않은 에너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100세를 바라보는 그에게 ‘현역’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그는 경기 용인 이영미술관 <전혁림 신작전-구십, 아직은 젊다>전에서 1,000호짜리 대작을, 서울 갤러리 ICAM <아흔셋 전혁림, 새 그림전>에서 신작 200여 점을 선보이는 등 아흔이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시다가 방문객들과 대화도 나누십니다. 가끔 작업현장을 구경하는 분들도 계신 까닭에 아버지께서 작품 활동에 자극도 받고 긴장도 하시는 거 같아요.”

아직 생존하는 화백의 이름을 따서 만든 미술관은 개관 초 주목을 받았지만 그 후로 3년 동안은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다.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우뚝 선 전혁림 화백의 아들이 관장으로 있기 때문일까. 지역에서 일각의 시샘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가 보다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코자 한 아들의 효심을 하늘에서 테스트하는 기간치곤 그는 혹독했다고 말한다.

“하루에 방문객이 한 명도 없던 적도 많았죠. 하지만 미술관 하나 만들어놓고 관광객이 넘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어요. 문화 콘텐츠가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난센스 아닌가요?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고, 또 아버지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손도 벌리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전 관장은 방문객이 오든 안 오든 매일 미술관을 쓸고 닦으며 정성을 다했다. 무료로 작품을 관람한 후 감동받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전혁림 미술관’이 지닌 정신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살아 있는 사회문화예술운동’이었다.

미술관을 지을 때 다소간 무리수는 뒀다. 은행 대출 등 미술관 건립에 총 7억 원 가량이 소요됐다. 그뿐 아니라 순수 유지비만 한 달에 350~400만 원씩 꼬박꼬박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밥상에 김치와 멸치만 올라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변에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그러던 3년 후 번쩍하는 ‘영감’이 스쳤다. 장기적인 미술관 운영의 토대로 문화상품 아이템을 개발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머그잔, 접시, 스카프, 넥타이, 손수건 등에 전 화백의 그림을 프린트해서 아트상품을 내놓자 예상보다 반응이 훨씬 좋았다. 더러는 불티나게 팔렸다. 기업이나 광역단체에서 몇 천 개씩 대량 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트상품 성공으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주문이 들어오면 상품제작을 외부에 의뢰해야 하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예 제 작업실에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가마를 설치해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요. 아마 미술관에서 직접 아트상품을 제조,판매하는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겁니다.(웃음)”

전영근 관장의 뜻을 알아주는 지인들도 나타났다. 바로 용인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이었다. “미술관이 힘들 때 아버지의 작품을 싼값에 사들이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유혹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작품의 진가를 인정하는 분이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그러다 제 뜻을 알아보는 분이 나타나신 거죠.” 현재 이영미술관은 전 화백의 작품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다.

전영근 관장은 미대를 나오지 않은 화가다. 1950년대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시절이었다. 사는 게 다 고만고만했다.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면서 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마루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일상이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격을 지닌 가난한 예술가의 아들로 평생을 살면서 예술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버지가 친구처럼 지내는 분들을 어릴 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죠. 유치환, 김춘수 선생님이나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님 등이 모여서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존경하고 싶었어요. 인생의 매력을 알고 있는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이상조차도 멋져 보였죠. 예술을 통해 마음속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나도 예술가가 되리라 다짐했었죠.”

전업화가로 사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자연스레 자신도 예술가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오로지 예술로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대학진학을 하지 않았다. 미술을 배운다고 하기보다 그림을 맘껏 구경하고 공부하고 싶어서 서른 살이 넘어 프랑스의 그랑드 쇼피에르 아카데미에서 3년 동안 공부한 게 미술교육의 전부다.

“예술을 하는데 대학을 안 나왔다고 폄하하는 건 말이 안되죠. 예술을 작품 자체로 인정해줘야 해요. 물론 좋은 대학에서 공부해 좋은 작품이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하지만 대학교육 시스템 자체가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전영근 관장은 청년 시절 방황할 시간도 없었다. 군 제대 후 지역 화가들과 함께 동인을 만들어 전시회를 하는 등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60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이하자 그는 자신보다 아버지를 보필하는 데 인생을 바친 편이다.

“아버지가 평생 그림만 그리셔서 사회성이 없으셨어요. 어머니는 연세가 너무 많으셨고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아버지가 맹렬하게 작품활동을 하도록 캔버스와 물감을 조달하고 전시회 때는 큐레이터 역할을 하는 등 철저하게 비서 역할을 하며 살았죠.”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못 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사람들은 오히려 아버지 덕에 출세했다고 질투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런 시선이 참기 힘들었지만 그는 대가의 아들이라면 거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견뎠다. 예술가로서 언젠가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공을 쌓는 데 승부를 걸었다. 작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초청 전시회를 한 후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서울이 아닌 뉴욕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미술관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최대한 안정적으로 운영할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제 목적은 미술관 운영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에 운영을 맡겨 ‘전혁림 시립미술관’이 되도록 하는 게 지금 계획이죠. 저는 제 예술세계를 다듬고 작품활동에 매진해 세계에서 인정받는 예술가가 되는 게 꿈입니다.”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