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앙팡테리블] (44) 영화배우 김예리무용수와 영화배우 '투잡', 무대 스크린 서 감춰진 열정 쏟아내

요즘 세상에 '투잡'을 하는 예술인은 이미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많은 연기자들은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양쪽의 자양분을 고루 흩뿌린다.

또 음악을 작곡하는 무용가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가수도 있다. 예술가들의 '투잡'은 대개 메인 작업을 위한 부수적인 일이거나, 혹은 교대로 이루어진다. 그만큼 두 분야를 '동시에' 잘 해내기란 쉽지가 않다.

현직 무용수이며, 영화배우인 김예리의 '투잡'은 그래서 독특하다.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됐지만, 그는 다른 배우들처럼 '연예인'은 아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한국춤을 전공하던 김예리는 같은 건물을 쓰던 영상원 학생(<기린과 아프리카>의 김민숙 감독)의 출연 제안으로 자연스레 영화계에 발을 들여놨다.

처음엔 춤추는 역할을 맡다가 <기린과 아프리카>에서는 멋모르고 주연까지 맡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연기상까지 받았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첫 장편 주연작 <푸른 강은 흘러라>에서는 정형적인 연기 틀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김예리-연변소녀'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감독님은 그냥 즐겁게만 하라고 했어요. 몸에서 '밝음'이 나오면 된다고. 감독님 말만 믿고 무작정 따라갔죠." 왠지 연변에 가면 무작정 다 될 것 같았다는 무대포 정신은 정말 능숙한 연변소녀를 표현해냈다. 하지만 연마되지 않은 재능은 금세 한계에 부딪히는 법.

김예리에겐 그때가 <파주>였다. "전작 <바다 쪽으로, 한 뼘 더>까진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파주> 때 다 무너져버렸어요. 연기력이 늘어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단 걸 깨달은 거죠."

모든 신인배우가 느끼는 한계를 접한 그는 절치부심하며 더 적극적인 대화, 더 많은 준비로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했다. <귀향>의 미혼모 역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아마도 경험해보지 못할 캐릭터에 정신적인 고통을 겪던 김예리. 그때 그에게 고해소이자 에너지의 원천이 된 것은 다시 춤이었다.

"마침 공연 준비도 같이 하고 있었거든요. 힘든 걸 끌어안고 연습실에 와서 몸을 움직이면 해소가 되는 거에요. 춤으로 위로받았던 거죠. 그때 둘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춤을 출 때도 눈에 띄는 편이 아니라서 영화에서도 작은 움직임만으로 무언가를 쉽게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는 김예리. 하지만 오히려 그의 매력이야말로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게 하는 그 눈빛이다. 배우 김예리를 설명하는 또 한 가지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자세다.

김예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무대에서든 스크린에서든 김예리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차분하게 쏟아낸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것은 그의 얼굴뿐만이 아니다.

올해 세 편의 영화가 잇따라 개봉되는 바람에 김예리는 자신의 '밑천'을 걱정한다. 하지만 엄살과는 반대로 그는 특유의 차분하고 신중한 행보를 다시 이어간다.

12월부터 국립오페라단의 첫 창작뮤지컬 <아랑>에서 무용수로 출연하고 월말에는 영화 <평범한 날들>의 촬영을 시작하는 것. '늘 해오던 대로' 춤을 추고 영화를 찍는 김예리. 무용가 혹은 영화배우라는 굴레에 담아두기엔 그의 에너지가 너무 크고 해맑다. 마치 그의 춤과 연기처럼.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