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윤정모 소설가한민족 5천년 전의 신화 10년간 추적, 장엄한 한민족 판타지 펴내

'왜 이걸 붙들고 10년이나 지내왔는지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만으론 버티기 어려웠을 거예요."

최근 인류의 역사시대를 연 수메르의 건국신화를 풀어낸 장편소설 <수메르>(전3권, 다산책방)를 펴낸 윤정모 소설가는 신간에 대한 남다른 소회부터 꺼냈다.

<수메르>는 세계문명의 기원인 수메르 역사가 다름 아닌 한민족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토대로 한 3부작 소설로 윤 작가가 10년 동안 집필한 작품이다.

<수메르>는 집필 기간도 그렇지만,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밤길>, <님>, <고삐> 등 주로 민족 현실과 분단 상황, 사회 대립과 갈등, 여성과 현실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온 윤 작가의 종래 작품세계와는 사뭇 다르다.

세밑인 28일, 인사동 찻집에서 만난 윤 작가에게 집필 배경부터 물었다.

"1984년에 '교육신문' 여기자가 가져다 준 <수메르 역사>(문정창 저)라는 책을 읽고 처음엔 너무 엉뚱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했어요. 잊고 지내다 1998년 영국박물관의 수메르 특별관을 관람하게 됐는데 숨이 멎을 듯이 강한 인상을 주면서 옛날 일이 생각났어요. 귀국하자마자 다시 책을 보고, 지인들을 통해 수메르와 관련된 책을 구해 읽었어요."

윤 작가는 2000년부터 수메르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고, 2005년 소설 <수메리안>(전2권, 파미르)을 냈다. 소설 곳곳에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시월 제천의식, 참성단, 천부경, 홍익인간 등의 요소를 가미해 수메르인이 우리 민족의 한 갈래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수메르의 역사, 기원은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은 부분이 많고, 특히 우리 민족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학계를 중심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메르는 기원전 4000년 경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원한 세계 4대문명의 하나로 고도의 문화유산을 남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윤 작가는 수메르를 제대로 알리고, 학계의 부정적인 시각에 '한마디' 하기 위해 소설을 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10년 가까이 자료를 찾고 현장답사를 한 끝에 수메르 문명이 한민족의 역사와 연결된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수메르인들 스스로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나 교착어와 청회색 토기를 사용하고, 순장의 풍습, 씨름 등 우리민족의 원형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어요. 다른 민족에선 찾기 어려운."

실제 수메르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윤 작가의 추론을 상당 부분 뒷받침한다.

미국의 언어학자 C.H 고든 박사는 "수메르인들은 동방에서 왔다. 그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갈 때 고대 문자식 기호를 가지고 온 듯하다"고 말했다.

<브리테니커 백과전>에는 수메르인들의 특징을 머리카락이 검고, 셈이나 함 어족과는 다른 교착어를 사용한다고 돼 있다. 또한 수메르의 묘장제도와 순장은 고대 한국의 풍습과 같고, 청회색 토기는 동이족에서 기원한다. 60진법과 태음력, 최고 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은 것도 한민족과 연결된다.

윤 작가는 수메르 유적이 남아있는 터키 앙카라 대학과 아나돌루 히사르 박물관 답사, 고대사 자료 등을 언급하며 수메르와 한민족의 또 다른 공통점들을 들려줬다.

수메르가 한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역사일 가능성은 없을까? 윤 작가는 "희박하다"고 단언한다. "인종, 언어, 생활, 문화 등을 종합할 때 수메르의 원형을 지닌 건 한민족 뿐이에요. 다른 민족에게 일부 공통점이 있을지 몰라도 원형까지 같지는 않아요."

학계의 부정적 시각에 대해 윤 작가는 학자다운 각성을 촉구했다. "수메르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추적하면서 광범위한 연구에 놀랐는데 그 중에 한국 학자는 거의 없어요. 소설을 문제 삼는다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바라요. 확신이 없다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소설은 <환단고기>, <천부경>, <삼일신고> 등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있는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윤 작가는 위서 논란에 대해서도 나름의 입장을 나타냈다. "우선 학자들이 해당 책뿐만 아니라 동양 고대사, 나아가 세계 고대사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 그러는지 묻고 싶어요. 고려시대, 조선 시대의 책에 수메르의 도시명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겁니까? 수메르의 묘장과 고구려 묘장에는 세계에서도 드문 특별한 안료를 사용했어요. 또 서양의 고대사 기록에는 환단고기 등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신간 <수메르>는 윤 작가의 기존 작품과는 내용이나 형식이 전혀 다르다. 역사, 신화에 기반한 소설로 집필에 어려움도 컸을 것이다.

"정말 어려웠어요. 기존 작품이 민족, 분단 등 역사 앞의 가지나 이파리를 얘기한 것이라면 이번 작품은 안보이는 뿌리를 얘기하려니 힘들었어요. 회의도 많았고요. 그래도 사명감 같은 것이 힘이 됐어요.

<수메르>는 2005년에 출간한 <수메리안>을 개정, 확장했다. 두 책의 차이를 물었다.

"2005년 것은 수메르 자료를 정리한 듯해 소설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워 몇 달을 앓았어요. 이번 신간은 소설화하면서 특히 1권에서 판타지를 빌려왔어요."

실제 제1권 '한민족의 머나먼 원정길'은 소호국의 태왕으로부터 왕자로 선택받은 조카 엔릴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은 동족 '딜문(딛을문)'을 구하기 위한 원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졌다.

제2권(영웅 길가메시의 탄생)과 제3권(인류 최초의 도시 혁명)은 자료에 충실했다는 게 윤 작가의 설명이다.

"길가메시의 경우 우리나라 번역본은 바빌로니아판이 많아 부정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많은데 신간에서는 수메르 신화에 충실하게 담았어요."

윤 작가는 특히 제3권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인류 최초의 혁명가인 우루카기나는 진짜 멋쟁이에요. 2500년 전 정의와 자유를 되찾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된다고 볼 수 있죠."

윤 작가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자칫 집필 의도를 오해(민족을 앞세웠다는)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작가는 그 점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이 책은 민족의 우수성을 거론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선조들이 남기고 후대 학자들이 찾고 연구해온 민족의 흔적, 문화와 전통, 정신세계를 소설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수메르> 집필과 관련, 더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물으니 윤 작가는 두 가지를 얘기한다.

하나는 오늘날 뉴욕, 런던 등의 문화, 예술의 거리, 큰 시장을 의미하는 '소호'의 어원, 또는 루트이다. 수메르를 세운 소호국과의 연관성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취지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기원을 알아보는 것이다. 동북공정을 비롯해 점차 한국에 경계 대상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의 소설 창작에 대해 물으니 "우리 나이 얘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고령화시대에 나이 든 사람의 불확실한 미래, 또 그런 인간들의 삶을 그리고 싶단다. 한민족의 대서사시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말하고 인간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윤 작가의 특유의 작품을 기대해 본다.

한민족 대서사시 <수메르>는 …

장엄했던 한민족의 혼을 찾아 10년여의 발품으로 완성한 <수메르>는 모두 3권으로 구성됐다.

제1권 '한민족의 머나먼 원정길'은 환족(桓族)이 터를 잡은 소호국의 태왕으로부터 왕자로 선택받은 조카 엔릴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은 동족 '딜문(딛을문)'을 구하기 위해 원정에 나선 내용을 그렸다.

엔릴은 소호국의 흥망이 걸린 원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고 딜문 정벌에 성공한다. 이후 5개의 도시를 잇따라 정복한 뒤 소호국의 태왕에게서 받은 옥새로 국가를 세우고 소머리국(수메르국)으로 명명한다.

제2권 '영웅 길가메시의 탄생'은 기원전 2812년부터 126년간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르크를 통치한 길가메시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지만 야성인 엔키두를 만나면서 각성하게 된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두 사람은 괴물 후와와와 맞서는 등 다양한 모험을 한다. 그러나 분신 같은 엔키두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길가메시는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제3권 '인류 최초의 도시 혁명'은 인류 최초의 도시 혁명가 우루카기나와 그 동지들의 민주혁명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루크에 별을 연구하는 사제로 가 있던 우루카기나는 고향 라가시로 돌아오지만, 왕인 루갈란다의 폭정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된 것을 보고 역사클럽 친구들과 함께 평등,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을 주도한다.

혁명을 통해 얻은 정의와 자유를 시민에게 돌려주는 한민족의 영웅담은 근대 이후 시민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윤정모 소설가는…

1946년 출생. 1970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대학 재학 중인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81년 <여성중앙>에 <바람벽의 딸들>이 당선됐다.
작품으로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밤길>,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 <님>, <고삐>, <빛>, <들>, <나비의 꿈>, <그들의 오후>, <딴 나라 여인>, <슬픈 아일랜드>, <우리는 특급열차를 타러 간다>, <꾸야 삼촌> 등이 있다.
신동엽 창작기금(1988년), 단재 문학상(1993년), 서라벌 문학상(1996년)을 수상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