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시그널 뮤직의 볼륨을 서서히 줄여가면서 DJ가 오프닝 멘트를 한다.

"안녕하세요. 김·광·한입니다. 1980년 4월1일, 광한이는 본격적으로 음악 전문 DJ를 시작했습니다."

1959년 11월 국내 최초의 전자제품인 금성 라디오 'A-501'80대가 생산된 뒤 1960년대부터 라디오 시대가 열렸다. 첫 음악 전문 DJ는 동아방송에서 국내 첫 음악 프로그램인 '탑튠쇼'를 만들었던 최동욱 PD. 1964년'세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면서 라디오 음악 방송의 디스크 자키(Disc Jockey)시대를 열었다. 그 해 MBC 라디오 PD로 입사했던 이종환도 '탑튠 퍼레이드'란 음악 방송을 진행하면서 'DJ 1세대'로서 수많은 청취자들과 시대를 함께 했다.

1970년대는 박원웅과 황인용이 '라디오 스타'였다. 1971년 MBC가 첫 FM방송의 전파를 쏜 뒤 박원웅은 1973년부터 1992년까지 '박원웅과 함께'라는 음악 전문 장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TBC(뒤에 KBS로 통합)에서 황인용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음악 전문 DJ시대는 1980년대 KBS 김광한, MBC 김기덕으로 이어지면서 황금기를 맞았다. 그들은 청소년들과 꿈을 심어줬고, 아날로그 시대의 얼굴 없는 인기인들이었다.

10~20대 팝송 세대들의 우상이었던 김광한이 세종로의 뮤직 박스에 나타났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여기는 대한민국 1970khz' 문화 체험전이 마련한 '전설의 DJ'란 프로그램에 참여해 최동욱, 박원웅 등 선배들과 함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

돈 생기면 청계천서 빽판 구입

"MBC FM에서 김기덕이 2시 데이트로 인기를 끌자 TBC에선 저 광한이를 내세웠어요. 무명이었던 저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뮤지션은 바로 '레이프 가렛'. 꽃미남 아이돌 팝스타 레이프 가렛의 내한 공연이 1980년 5월12일 남산 숭의 음악당에서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저, 광한이가 재빠르게 공연 기획사로 연락해 레이프 가렛의 동정을 매일 방송을 통해 팬들에게 알렸습니다. 방송국 전화에 불이 났습니다. 레이프 가렛입니다. 아이 워즈 메이드 포 댄싱(I was made for dancing)~"

뮤직 박스에 서서 헤드폰을 낀 채 LP판을 닦고,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음향 기기를 다루는 솜씨가 여전하다. 팝 뮤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노래의 선율에 맞춰 전해주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다음 신청곡은 '나가수'의 스타 임재범이 영향을 받은 가수, 마이크 볼튼이 부르는 '왼 어 맨 러브스 어 우먼(When a man loves a woman)'입니다."

작은 꼭지에 보내온 사연을 읽어주고, 신청곡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고…. 세종문화회관 음악 다방의 저녁 시간은 시나브로 흘렀다.

-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라디오 시대가 가고 영상 시대가 열렸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음악 전문 DJ를 시작했는지요.

"저 역시 10대부터 팝 음악을 좋아했어요. 최동욱 선배가 진행하던 음악 방송을 즐겨 들었고, 미군 방송인 AFKN의 음악 방송도 많이 들었어요. 자연스런 성장기였지요.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청계천의 레코드 가게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빽판'(불법 복제 LP판)도 많이 사서 모았습니다. 그리고 1966년 열아홉살 때 처음으로 FBS에서 DJ를 시작했어요. 아마 최연소였을 겁니다."

- 팝 뮤직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했던 시기인데요.

"자료라는 것이 딱히 없었지요. 그래서 해외 토픽에 팝 스타들의 근황이 소개되면 무조건 스크랩했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팝 음악 관련 책을 사서 읽고 정리했어요."

그 뒤 김광한은 1년 동안의 짧은 DJ생활을 접고 14년 동안 방황했다. 군대를 갔다 오고, 학교를 마치고, 직장 생활도 해봤지만 '이건 아니다'싶었다. 그리고 1980년 봄 동양방송(TBC)에서 본격적으로 라디오 DJ 활동을 했다. 그 해 11월 군사정권의 방송통폐합으로 TBC가 KBS로 통합된 뒤에도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팝송을 전파에 실어 전국에 알렸다.

라디오는 상상력 자극하는 매체

- DJ란 어떤 직업인가요.

"원래 DJ는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됐어요. 1명의 진행자가 음악도 틀고, 일기예보도 하는 등 1인 다역을 하기 위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전해 음악 프로그램에서 선곡하고, 음악 틀어주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DJ는 음악을 통해 애호가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는 사람이죠. LP판으로 음악을 만나다 보면 아티스트와 교감할 수 있어요. 음반을 닦고,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바늘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음악을 만든 이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요. 디지털 음반에선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요."

- 이젠 전문 음악 DJ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 탓이겠지요. 요즘 음악 방송 진행자는 목소리, 말투, 유머 감각 등을 먼저 보보는 것 같아요. 가수나 연기자, 연예인 중에서 조금 인기 있으면 DJ를 맡고 있으니 예전의 음악 전문 DJ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지요. 점점 음악 전문 DJ가 사라지는 세태가 몹시 아쉽지요."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라디오 시대'에는 청취자들이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상상력을 동원해 귀로 음악을 감상했다. 그러나 디지털 영상 시대에는 이런 상상력이 설 곳이 없어졌다.

김광한은 라디오 DJ에서 '비디오 자키'로 영역을 넓혀 간 주인공이었다. '유머 1번지'란 TV 프로그램 중에 뮤직 비디오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다.

-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방송도 빠르게 변했습니다. '비디오 자키'란 생소한 역할로도 많은 청소년들과 교류했는데.

"뮤직 비디오를 구하기 힘든 시절도 있었어요. 그 당시 자비로 해외 팝 스타들의 공연 영상을구입해 주말마다 전국을 순회하며 무료로 뮤직 비디오 공연도 했어요. 팝 음악이란 것이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음악이란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지요. 청소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와 함께 성장하는 것 아닙니까."

DJ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음악 다방은 낭만을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인기 DJ에겐 팬이 많았다. 수백 마리에서 수천 마리까지, 행운이 온다는 '종이학'을 접어 선물했다. 때론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전설의 DJ'로 불리는 김광한은 지금도 인천 교통방송에서 DJ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매달 첫 토요일이면, 많은 LP판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 중랑구 회기동 경희대 앞의 작은 카페에서 '추억의 음악 다방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DJ 김광한은 오늘을 사는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음악을 통해 호기심을 키우고, 꿈과 희망을 찾길 바란다. '라디오 시대'의 DJ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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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창호기자 ch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