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전교수
재임용 탈락 "보복이다" vs "자질 부족"
석궁소지 의도 "겁주려고" vs " 테러 의도"
석궁 맞았나 "쏘지 않아" vs " 피 흘렸다"
"누구 말이 맞나" 두고두고 쟁점

영화 '부러진 화살'의 관객 수가 드디어 200만을 돌파했다. 개봉한 지 꼭 2주 만이다. 실제작비 5억원의 저예산 영화로 제작 당시에는 별다른 화제를 일으키지 못했던 이 영화는 개봉 전 다수의 시사회를 통해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같은 기록을 세웠다.

흥행의 가장 큰 요인은 현 사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스토리 라인'이다. 여기에 양승태 대법원장과 실제 소송에서 주심을 맡았던 이정렬 판사를 비롯, 다수의 법조인들과 진중권 등 유명인들이 관련 발언을 쏟아내며 끊임없는 논쟁을 양산해 내 흥행를 가속화시켰다. '부러진 화살'의 성공으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사법테러의 피해자로 그려진 김명호(54) 전 교수는 연일 매스컴의 조명을 받고 있다.

김명호를 둘러싼 극단의 평가

195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김 전 교수는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았다. 미국으로 유학한 뒤 1984년 오하이오주립대 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1988년에는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로 임명된 김 전 교수는 1995년 시련의 첫발걸음을 뗀다. 그 해 1월 성균관대 대학별 고사 수학문제 채점위원으로 나서 수학 시험 7번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던 성균관대 측은 해당 문제를 틀렸다기보다는 적절하지 않은 문제라고 결정했고, 같은 해 5~7월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들이 김 전 교수에 대한 징계요구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2월 김 전 교수는 교원인사위원회를 통해 재임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전국 44개 대학 수학과 교수 189명은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성균관대에서 제시한 모범 답안은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도하기 위한 방편"이라며 "이를 둘러싼 갈등이 인사에 영향을 미쳤다면 매우 잘못됐다"라는 내용의 연판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김 전교수가 대학측을 상대로 낸 지위확인 소송에서 성균관대의 손을 들어줬다.

실망한 김 전 교수는 가족들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 것은 2005년 1월 사립학교법이 개정되면서. 재임용이 거부된 교원이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심 청구나 법원 소송을 할 수 있게 되자 김 전 교수는 바로 귀국, 성균관대를 상대로 재임용 탈락 취소 소송을 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이번에도 김 전 교수의 재임용 탈락이 정당하다고 판결했고 항소한 김 전 교수는 2007년 1월 또다시 패소했다. 결국 김 전 교수는 석궁을 들고 2심 재판장인 박홍우 부장판사를 찾아가게 된다.

김 전교수가 거의 '마지막 투쟁'으로 가기 전까지의 삶은 여기까지다. 박 판사를 찾아간 뒤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헝클어졌다.

박훈 변호사
영화 '부러진 화살'의 스토리도 그렇고, 포털사이트, SNS 등에서 김 전 교수는 주로 정의로운 사법투쟁의 사도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에 대해 불만 섞인 시선도 상당하다. 범상치 않은 김 전 교수의 발언과 행보들이 그에 대해 양극단의 인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양심 있는 수학자 vs 자질 부족한 교수

김 전 교수를 둘러싼 첫 번째 쟁점은 그가 교수 재임용에서 떨어진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김 전 교수는 재임용 탈락이 성균관대 수학과의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이사장의 권력과 그로 만들어진 질서가 강하게 작동되는 사립학교의 특성상 학자의 양심을 주장한 것 때문에 쫓겨났다는 내용이다.

재판부와 성균관대 측의 입장은 다르다. 교육자로서의 자질 부족이 재임용 탈락의 진짜 이유였다는 것. 판결문에 따르면 김 전 교수는 수업시간 중 밖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에 대해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며 "내가 내년에 학과장이 되면 과내 모든 서클을 없애버리고 학생회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립학교법이 개정된 뒤 다시 시작된 김 전 교수의 항소를 기각한 서울고등법원이 밝힌 사유도 "연구실적 및 전문영역의 학회활동 기준에는 적합하지만 학생 교수ㆍ연구 및 생활지도 능력과 실적 품위유지 기준에는 현저하게 미달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공판 증거물 중에는 김 전 교수에 대한 불만이 담긴 학생들의 진술서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대해 김 전 교수는 "부교수 승진 임용 심사에서는 연구실적만 따지게 되어 있지 자질평가 항목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학교 측에서 자르려고 마음먹은 인물이 있을 때 주관적 지표를 들이대며 멋대로 탈락시킨다는 것이다.

사법살인에 분노한 레지스탕스 vs 사법권위 허무는 테러리스트

김 전 교수를 둘러싼 두 번째의 쟁점은 그가 석궁을 들고 간 의도가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김 전 교수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하는 양측 모두, 김 전 교수가 석궁을 들고 찾아간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의도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을 보인다. 김 전 교수는 그냥 겁주려는 의도였다고 항변한다. 왜 법대로 판결하지 않고 재판 테러를 했는지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쏠 생각이 있었다면 당연히 멀리서 조준해 쏘지 않았겠냐는 것이 김 전 교수의 주장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 전 교수의 행위 자체를 의도적인 테러행위로 규정했다. 석궁을 챙겨간 것부터가 살인미수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대법원은 '비상 전국법원장회의'를 열고"이번 사태는 국민의 자유와 안전을 책임지는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위협"이라고 단정 지었다. 재판이 진행되기도 전이었다.

'부러진 화살'이 화두로 떠오르자 다수의 법조인은 "가능한 한 잘못된 판결이 없어야 하고 이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설사 잘못된 판결을 했다고 하더라도 석궁을 든 것은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김 전 교수는 "법원 판사들은 나를 석궁으로 위협한 정도가 아니라 법적으로 나를 죽였다"며 "헌법 전문에 보장된 국민저항권 차원의 정당방위"라고 항변했다. 판결에는 승복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원칙이지만 정당한 판결이 아닌 상태에서 약자의 마지막 저항권을 썼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사법 권위주의를 위한 희생자 vs 의도적인 확신범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쟁점은 과연 김명호 전 교수가 정말 석궁을 쏴서 박홍우 부장판사를 맞췄는지 여부다.

김 전 교수는 '석궁을 쏘아 박 판사를 맞췄다'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 전 교수는 1심, 항소심을 포함해 15번의 재판과정 동안 일관되게 '석궁을 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김 전 교수는 오발된 화살이 벽에 맞아 부러졌고, 박 부장판사가 흘린 피는 자해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변호인 또한 내의와 조끼에 있는 혈흔이 중간에 있는 와이셔츠에는 없는 점, 판사가 맞았다는 화살이 사건 이후 분실된 점 등을 증거로 내세웠다.

재판부는 그러나 셔츠에 혈흔은 없었지만 증거조작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박 부장판사가 화살 9개를 현장에 가지고 갔으므로 증거로 적법한데다 목격자 등 유죄를 증명할 다른 증거도 많다고 판단했다.

이 쟁점에 대한 양측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재판부가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화살이나 상처, 옷의 핏자국에 대한 감정을 의뢰하는 김 전 교수와 변호인의 요청을 묵살하면서부터다.

김 전 교수 측은 증거물인 박 부장판사의 옷에 묻은 피와 실제 피를 국과수에 보내 대조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혈흔 감정을 해도 자해인지 화살 때문인지 알 수 없어 의미가 없다"라며 "김 전 교수는 혈흔 대조를 통해 무엇을 밝히려는 것인지도 설명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1심 때 자신의 진술을 자주(?) 번복했던 박 부장판사를 다시 증인으로 불러달라는 김 전 교수 측의 요청도 재판부는 "위증도 없었고 이미 1심 때의 9차례 재판에서 충분히 진술했다"며 기각했다.

일련의 재판과정에 대해 김 전 교수 측이 주장하는 바는 분명하다. 김 전 교수는 분명 쏘지 않았는데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이다. 법원 측은 그러나 재판이 피고측의 부당한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곳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행범이고 수많은 증거와 증인이 있는 상황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정영진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지난달 26일 법원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이 사건은 어느 형사 사건보다 피고인 측 증거 신청을 많이 받아 준 사건"이라며 "영화에서는 종전에 진행된 공판 내용들은 대거 생략하고 피고인 측 증거 신청이 기각되는 장면들만 과도하게 부각됐다"며 유감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수학=법'이라 외치는 원칙주의자 vs 사법 불신이 가득 찬 소송꾼

마지막 쟁점은 법에 대한 김 전 교수의 의식이 과연 어떠냐는 점이다. 4년형을 마친 김 전 교수는 현재 관련 사건에 대한 저서를 집필 중이다.

김 전 교수는 당시 재판 과정에서 위법했다고 판단한 판사 수십 명을 고소했다. 그와는 별개로 2011년 1월 만기 출소할 때까지 김 전 교수가 낸 헌법소원만 해도 무려 500여 건에 달한다. 이 중 99%가 사전심사에서 기각됐는데, 김 전 교수는 그 과정 또한 위법했다고 지적한다.

김 전 교수는 또 재판일지를 포함한 사건의 전 과정을 2006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http://seokgung.org/)에 상세히 기록해오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그가 위법사항이라고 판단하는 법조인들을 실명과 함께 거론해놓았다.

김 전 교수에 대해 법조인들은 '사법 불신에 가득 찬 소송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사법부에 대한 분노로 이어져 말도 안 되는 딴지를 끊임없이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전 교수는 "수학과 같이 합리적이고 모순이 없는 법이 존재함에도 정작 판사들이 이 법을 위반하면서 소송을 진행한다"며 "법원이 바뀌면 우리나라의 많은 것들이 제대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자신이 꿈꾸는 사회에 대해 "내가 법과 원칙을 지키면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나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라고 전했다.

●석궁테러사건 일지

1991년 3월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 임용
1995년 1월 성균관대 대학별고사 수학 입시문제 오류 제기
1996년 2월 조교수 재임용 탈락
1997년 12월 지위 확인의 소 상고 기각, 출국
2005년 3월 귀국
3월3일 교수지위 확인 소송 제기(서울중앙지법)
9월21일 지위 확인의 소 기각
10월 18일 지위 확인의 소 항소(서울고법)
2007년 1월12일 지위 확인의 소 항소 기각
1월15일 석궁테러사건 발생
10월16일 석궁테러사건 1심 징역4년 실형 선고(서울동부지법)
2008년 3월14일 석궁테러사건 2심 징영4년 실형 선고(서울동부지법)
6월12일 석궁테러사건 대법원 상고 기각
2011년 1월24일 만기 출소

노동현장 한길 지켜온 변호사

■는 누구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본 관객들의 관심은 또 다른 주인공인 에게도 집중됐다. 판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다소 특이한 박 변호사의 모습에 호감을 느낀 탓이다.

박 변호사는 전남대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3년간 동양매직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갑을 관계의 영업환경에 염증을 느낀 31살에 퇴직금을 들고 신림동에 들어간 그는 1998년 마침내 40회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사회 생활을 재개한 박 변호사가 가장 먼저 찾은 직장은 민주노총 금속노조(금속연맹) 법률센터였다. 박 변호사는 2001년 대우차 부평공장 집회 때 인천지법의 판결문과 핸드마이크를 들고 300여 명의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했다가 경찰의 물리력 행사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는 등 항상 약자의 편에서 활동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변호사는 또 2007년 수백억원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았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이 떨어지고, '보복 폭행' 혐의를 받았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을 당시 재판부를 비판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쓰는 등 앞뒤 안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에게도 자신을 철학 있는 양아치 변호사로 그려달라고 주문했을 정도다.

46살인 지금까지도 변변한 집 한 채 갖지 못한 박 변호사의 멘토는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의 김기덕 변호사다. 사법연수원 2년차 시절 김 변호사에게 필이 꽂힌 박 변호사는 함께 일해보자는 김 변호사의 제안을 받은 후 지금까지 노동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부러진 화살'이 흥행가도를 달리며 박 변호사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인터뷰 요청도 쇄도하고 지난 15일 문을 연 블로그(의 세상만사)를 관리하는 것도 정신이 없다. 블로그에는 '1심 7차 공판 속기록'(2007년 8월 28일), '항소심 2차 공판 속기록'(2007년 12월 10일), '항소심 3차 공판 속기록'(2008년 1월 28일) 등 석궁테러사건과 관련한 자료들이 올려져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