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요계 강타 '악동뮤지션'솔직 담백 감칠맛 가사에 뛰어난 작곡 능력 더해 발표곡마다 음원차트 1위10대부터 50대까지 인기 발전거듭하며 '무한성장 중'

이찬혁(18)ㆍ이수현(15) 남매로 구성된 2인조 '악동뮤지션'이 국내 가요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이 방송에서 부른 노래는 어김없이 각종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가 된다. 국내 음악통합차트인 '가온차트'에도 수시로 오르내린다. 일각에선 이들 남매가 획일화로 얼룩져 온 대중가요계를 변화시킬 '메시아'라는 얘기마저도 나온다.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10대 남매가 톱스타보다 더욱 가요계를 흔들어대고 있는 상황. 지금 이들의 인기는 이미 '대중의 사랑'을 넘어 '신드롬'이란 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체 그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

등장 동시에 인기폭발

'악동뮤지션' 이찬혁·이수현 남매의 집은 몽골에 있다. 한국에 살다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몽골로 이주했다. 정규교육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홈스쿨링'을 받았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SBS 'K팝스타2' 출전을 위해서였다.

남매는 지난해 11월18일 첫출연부터 심사위원들과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다리를 꼰 상대방이 아니꼬워서 그 모습을 따라 했지만 다리가 저리기만 했다는 코믹한 내용을 담은 자작곡 '다리꼬지마'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3HWCOM 제공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호평을 쏟아냈다. 보아는 "아 좋다!"라며 박수를 쳤고, 박진영은 "이게 바로 싱어송라이터고 듀엣이다. 찢어 놓을 수가 없다. 두 사람 사이 연기 보셨냐. 완벽한 호흡이다"라고 말하며 이들에게 합격을 선물했다.

양현석 역시 "'K팝스타2'를 통틀어 진정한 아티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분명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이날 오후 7시30분 '다리꼬지마'는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이어 회를 거듭하면서 '매력 있어', '못난이', '착시현상', '라면인 건가' 등 발표하는 자작곡마다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이외에도 인터넷에서는 자작 동영상인 '갤럭시', '먹물 스파게티', '기브 러브' 등의 곡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악동뮤지션의 인기는 보통 아이돌의 '반짝 인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다리꼬지마'가 발표된 뒤 순위 50위권을 벗어나는데 걸린 시간은 9주. '매력있어'는 10주가 지나서야 50위권을 이탈했다. 아이돌 음악은 7주 정도면 순위권 아래로 떨어지는 게 보통이다.

또 국내 '가온차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검색어 통계 회사인 '소셜메트릭스'를 통해 조사한 'SNS 버즈량'(트위터와 블로그 등에서 검색어가 거론된 횟수)은 악동뮤지션의 인기를 여실이 보여준다. 자료에 따르면 악동뮤지션의 버즈량은 지난달 3일 1,293건에 이어 10일 1,952건, 17일 2,291건 등으로 나타났다.

악동뮤지션은 종종 "10대 취향에 머무르고 있는 곡의 틀을 깨야 한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인지도는 젊은층에만 그치지 않는다. 멜론의 '검색트렌드'를 보면 30~40대도 이들을 검색하고 있다. 특히 50대의 검색율은 기타 연령대 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부모 세대의 관심마저 받고 있다는 얘기다.

악동뮤지션의 인기는 눈치 빠른 광고계가 먼저 알아봤다. KT가 '올아이피' 모델로 오디션 과정 중인 악동뮤지션을 모델로 뽑았다. 광고음악인 '올아이피 송'도 남매가 촬영장에서 30분만에 즉석으로 지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KT는 광고인지도가 90%에 이른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작곡가 김형석은 악동뮤지션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을 대중 음악계 변화의 신호로 해석했다. 그는 "버스커버스커와 악동뮤지션 등 오디션 출신들, 장기하, 십센치, 페퍼톤스 등 인디밴드의 부상은 대중들이 기존 프로덕션의 비슷한 프로세스와 뻔하고 획일화된 음악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연예계는 악동뮤지션이 대중 음악계 변화의 열쇠가 되리란 기대를 걸고 있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한국 대중음악계는 상당 기간 획일화로 얼룩져왔다"며 "악동뮤지션이 그런 음악계의 색채를 다양화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뛰어난 작곡, 감칠맛 나는 가사

그렇다면 악동뮤지션이 대중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먼저 작곡 능력이 꼽힌다. 악동뮤지션은 미발표곡까지 포함해 모두 48곡의 자작곡이 있다.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가수 못지않은 가창력을 지닌 참가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자작곡을 보유한 이는 그동안 없었다.

창작력만 뛰어난 게 아니다. 기존의 곡을 재해석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는 Top5 경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K팝스타2'는 참가자들이 노래를 선곡해온 기존 방식에 변화를 줬다. 심사위원들이 직접 참가자들이 부를 노래를 지정해 준 것. 심사위원들은 악동뮤지션의 보컬 능력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타미아의 '오피셜리 미싱 유(Officially Missing You)'를 선곡했다.

이날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악동뮤지션은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이 곡을 편곡해 불렀다. 심사위원 점수는 287점. Top5 가운데 최고점이었다. 자작곡 위주로 무대를 꾸며 온 악동뮤지션이 새로운 도전에서 성공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코드 진행도 매력이다. 일반인에게 너무나 낯선 화성이어서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시청자들은 이를 '참신함'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제대로 된 음악 수업을 거치지 않은 점이 오히려 '한몫'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 이찬혁은 작사부터 작곡, 기타 반주까지 담당하고 있지만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해 악보를 읽지 못한다. 대신 그림과 문자를 사용한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작곡을 한다. 그만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곡들이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감칠맛 나는 가사도 인기요인이다. 정형화된 가요곡에서는 접하기 힘든 소재와 가사를 내놓았다. 노랫말을 애써 아름답게 포장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시선에서 본 그대로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냈다.

무엇보다 이들이 이야기하듯 툭툭 던지는 노랫말은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다. 대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셈이다. 여기에 사실적이고 재치 있는 묘사로 호응을 더하고 있다.

성장은 '현재진행형'

악동뮤지션의 등장 초기, 대중과 심사위원의 평가에는 온도차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3명의 심사위원들은 악동뮤지션의 작곡능력과 이수현의 개성 있는 목소리에는 좋은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이들의 대중성과 잠재적인 발전 가능성에는 의문을 품어왔다.

때문에 악동뮤지션은 두 차례의 탈락 위기를 겪기도 했다. 생방송 경연에서 시청자 문자 투표를 통해 구제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빙판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악동뮤지션은 발전을 거듭하며 '무결점 참가자'로 거듭나게 됐다. 악동뮤지션의 성장이 '현재진행형'이란 얘기다.

현이와 덕이
악동뮤지션을 음식으로 따지면 재료 그 자체로 맛을 내는 음식에 가깝다. 어떤 조미료를 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단 얘기다. 이들 남매는 어떤 풍미를 내는 뮤지션으로 성장할까. 여기에 가요계와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남매 듀엣 '원조'



'너 나 좋아해'등 수많은 히트곡 남기고 1990년 나란히 요절

한국 가요사에 악동뮤지션 같은 남매 듀엣은 흔치 않다. 윤복희-윤항기, 장미리-장재남-장은아 등 남매 가수가 있었지만, 정식 듀엣은 아니었다. 70년대 중ㆍ후반에 활동했던 장덕-장현 정도가 본격적인 남매 듀엣이다.

이들 남매는 첼리스트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예술적 감각을 타고났다. 특히 장덕은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천재적인 소녀였다. 28살이란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15세부터 싱어송 라이터로 활동한 만큼 200여곡의 노래를 남겼다.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소녀와 가로등'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등이 대표적인 명곡이다.

장덕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건 15세에 'MBC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면서다. 이후 장덕은 오빠 장현과 함께 ''라는 이름으로 가수로 등장했고 하이틴 영화에 출연도 했다. 많은 노래들이 남매 듀엣인 '' 이름으로 발표됐다.

장덕은 이혼한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가 유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우울한 결혼생활과 향수병으로 귀국했다. 음악활동을 재개했지만 예전만한 인기는 누리지 못했다.

그러던 1990년 2월 장덕은 설암에 걸린 오빠를 간호하다 서울 마포구염리동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오빠 장현은 혀의 일부분을 자른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거부했고 결국 같은해 8월 운명을 달리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