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당 신임 대표 천호선학생·노동운동하며 두차례 옥고 1991년 노무현 권유로 정치 입문새로운 진보정치 선봉장 맡아 "새누리·민주 양당 구도 혁파"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21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당원대회에서 대표직을 수락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당'으로 당명을 바꾼 구 진보정의당의 새 선장을 천호선 후보가 맡게됐다. 정의당은 지난 22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2013 진보정의당 혁신전당대회' 열고 새로운 당 대표로 천호선 후보를 선출했다.

천 대표는 정치권에서 '친노'로 분류되지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자신의 정치보다 다른 정치인의 조력자로서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청와대 3대 요직인 국정상황실장과 의전비서관, 대변인 등을 모두 역임했지만 출사표 한번 던지지 않았다.

천 대표가 살아온 삶은 순탄치 않다.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하다 두 번이나 철창에 갇혀야 했다. 한때는 고액 연봉을 자랑하는 '스타 학원 강사'였지만,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설득으로 단박에 모든 걸 내려놓고 험한 정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후 천 대표는 20년간 정치권 변두리를 맴돌며 '세대교체'의 선도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정의당의 수장으로 나서면서 정치권 중심에 첫발을 딛게 됐다. 그런 천 대표가 걸어온 삶을 노선을 되짚어봤다.

운동권 활동하며 투옥생활도

천호선(가운데) 정의당 대표가 23일 국회 정의당 사무실에서 첫 상무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에서 태어난 천 대표는 학창시절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조용히 공부만 한 탓에 리더십도 없었다. 중학교 때 임시 부반장을 한 게 유일한 감투다. 천 대표는 당시의 자신을 '전형적인 FM 학생'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천 대표는 1982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연세대 2학년 시절 반 지하 서클인 '목하'에 가입하면서다. 이 서클은 연대 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온 '운동조직'으로 일정한 심사를 거쳐 가입이 허용됐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품성이 좋았던 천 대표는 시위팀을 조직하고 이론을 다졌다. 급기야 4학년 때는 연대 학생운동의 '중앙'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각종 시위는 물론 학생운동의 방향과 이론 대부분이 천 대표의 손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는 등 고충도 적지 않았다. 첫 투옥은 대학 4학년 때다. 당시 천 대표는 연대에서 시위를 하다 체포돼 4개월의 형을 살아야 했다. 경찰과 손잡은 선배로 인해 노출된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다. 1987년 항쟁이 일어날 당시 천 대표는 전자 계열 한 대기업 회사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경찰에 구속돼 1년2개월 동안 복역했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취임 첫날인 22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금 생활을 끝내고 세상 박으로 나온 천 대표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대형학원 단과반 영어 강사를 시작했다. 문제는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4개월 동안 단과반 강의를 했으나 학생이 모이지 않았다. 결국 학원에선 특단의 조치로 예고도 없이 천 대표의 책상을 치웠다. 사회의 '쓴맛'을 본 그는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고액 연봉을 받는 톱클래스 강사'로 거듭났다.

노무현 권유로 정치권 첫발

그런 천 대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1991년 당시 국회의원이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광재 당시 비서가 신혼집에 불쑥 찾아오면서다. 천 대표의 부인이 노 전 대통령 의원 실에서 일한 인연이 있어서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매력에 이끌린 천 대표는 곧바로 학원을 정리하고 5급 비서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년 후 노 전 대통령 낙선한 뒤 유인태 의원실로 '팔려' 갔다.

당시 천 대표는 지방자치제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유 의원이 내무위원회(현 안행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정치인들조차도 지방자치에 대해 문외한이던 시절이었다. 천 대표는 '밑바닥부터 배우겠다'는 자세로 임했다.

그러한 노력은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가 본격 시작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천 대표는 386세대 신인 정치인의 지방자치 진출을 후원하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이론가로 활약했다. 그 덕인지 민주당에서 30대 서울시 의원 10여명이 나오고 구의원까지 상당수가 당선됐다.

정작 천 대표는 출마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출마형'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은 가만 있지 않았다. 계속되는 출마 권유에 그는 결국 지역정치를 경험하기 위해 지역으로 내려갔다. 민주당 송파지구장 사무국장이 천 대표의 귀착지였다.

그러던 2001년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의지를 확인하고 인터넷 분야의 책임자로 합류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치 전문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했다. 정치광고기획사 성격을 가미해 나름대로 언론 매체 기능을 담당했다. '인터넷 정치'의 돌풍을 연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노 전 대통령은 당당히 대선에 승리했다. 이후 천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의전 비서관과 국정상황실장, 대변인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천 대표는 당시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한다.

천 대표는 국정상황실장보다는 대변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참여정부 말기 언론과의 관계가 어려웠을 때 대변인을 맡았고, 국민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브리핑을 생중계하기로 결정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천 대표는 노무현정부가 막을 내린 2008년 말부터 창당을 준비했으나 이듬해 5월 노 전대통령 서거로 미뤄지다 2010년 1월에야 국민참여당을 발족했다. 신당에는 천호선 대표를 비롯해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인사들과 친노(친노무현) 인사가 중심이 된 참여정치실천연대 출신들, 구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참여했고, 천 대표는 최고위원에 선임됐다.

이후 국민참여당은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통합연대) 등과의 통합으로 창당 23개월 만에 해체되고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다. 천 대표는 통합진보당의 대변인과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천 대표는 지난해 19대 총선에서 야권연대를 통해 서울 은평을에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새누리당 후보였던 이재오 의원에게 1.14%의 격차로 아쉽게 패했다.

이어 19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 부정선거 논란으로 인한 통합진보당 분당사태 때 노회찬ㆍ조준호 현 공동대표, 심상정 원내대표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고, 진보정의당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정의당 천호선호(號) 항로는?

이번에 정의당 대표를 맡게 되면서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된 천 대표는 정의당이 체질 변화를 예고했다. 천 대표는 취임연설에서 "모두를 위한 복지 국가, 평화로운 한반도를 기본방향으로 하겠다"고 당의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천 대표 체제의 정의당은 보편적 복지, 공정한 시장, 노동권 보장, 협동경제 확대를 핵심과제로 삼을 계획이다. 또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성과를 배우고 이를 국내실정에 맞게 적용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한다.

천 대표는 또 "평화를 파괴하려는 누구의 도발도 어떠한 음모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의 도발이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비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꺼리는 통합진보당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대여 관계와 관련해 천 대표는 새누리당을 겨냥한 강도 높은 견제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민주당에 대해서도 "민주 진보정치 진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지 오래됐지만 아직 신뢰할 만한 새로운 리더십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거대양당체제에 대한 반감도 드러냈다. 천 대표는 "양당의 기득권구도를 혁파하는 정치개혁의 고삐를 결코 늦추지 않겠다"며 교섭단체 제도 등 거대양당 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치제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진보신당 등 진보진영, 무소속 안철수 의원 등과의 연대 가능성도 시사했다. 천 대표는 "우리가 지난 혁신당대회에서 제출한 '국민과의 약속'을 존중하는 정치세력이라면 그 누구와도 당을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통 민중운동ㆍ진보정치 운동가 출신이 아닌 천 대표가 어떤 리더십으로 당을 변화시켜 대중적 진보정당을 만들어 가게 될지 그의 행보에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의당의 뿌리는 '국민승리 21'



정의당의 기원은 1997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를 낸 '국민승리21'이다. 공식 당명은 '건설 국민승리21'이었다. 원외정당에는 가나다순으로 기호를 배정하는데, 공화당 허경영 후보에 밀려 5번을 받을 처지가 되면서 고육지책으로 '건설'을 붙였다.

이후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으로 탈바꿈했다. 진보정당이었으나 이름에 진보는 없었다. 그리고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으로 나뉘었다. 진보정의당은 당명에서 '진보'를 떼 내고 새 이름으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진보정의당은 당명을 '정의당'으로 바꿨다. 당초 사회민주당, 민들레당, 정의당 등 당명 후보군을 놓고 당원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과반인 51.8%의 지지를 받은 '정의당'이 새 당명으로 결정됐다.

NLL 정국에 친노 재결집… 천호선은?



친노(친 노무현)는 야권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광범위한 세력을 갖추고 있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친노 일원이 된 것은 1990년대 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으면서다.

친노의 발원지는 변호사 노무현이 활동하던 1980년대 초 부산이다. 평생 동지 문재인과 이호철을 만난 것도 이즈음으로 '부산대 총학생회장 3인방' 정윤재ㆍ최인호ㆍ송인배 등과 함께 '부산팀'을 이뤘다.

이후 친노는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2001년 민주당 대선경선에 나서기까지 1~3기 비서팀이 주축을 이뤘다. 이광재 안희정 천호선 서갑원 백원우 여택수 등이 그들이다.

2000년 노 전 대통령의 총선 낙선 뒤 결성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은 부산팀, 비서팀과 함께 친노의 '3대 뿌리'로 꼽힌다. 문성근과 명계남, '미키루크'란 필명으로 알려진 이상호가 핵심이었다.

2002년 대통령 당선과 함께 청와대와 행정부가 친노의 새로운 인력풀로 등장했다. 천호선 대표는 청와대 의전 비서관과 국정상황실장, 대변인을 맡아 대통령을 보필했다.

친노는 노 전 대통령 임기말 분열되기 시작해 열린우리당이 대선이 있던 2007년 8월 탈당파들이 만든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며 구심점이 사라지게 되자 사분오열했다.

이해찬은 탈당해 시민단체 '민주권'을 만들었고, 부산팀과 청와대 참모그룹, 학자그룹의 다수는 정치권을 떠나 미래발전연구원, 노무현재단, 봉하재단 등으로 흩어졌다. 천호선은 참여정부 일원으로 일했던 이병완, 이재정, 이백만 등, 그리고 탈당한 유시민과 함께 국민참여당을 창당했다.

반면에 안희정ㆍ이광재 등 측근 비서그룹과 김원기ㆍ한명숙ㆍ이강철 등 원로그룹, 관료 출신과 청와대 386그룹의 다수는 민주당(당시 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았다.

친노는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의 주류를 이루고 이해찬이 당 대표, 문재인이 대선 후보가 되면서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대선 패배로 친노는 한동안 당 외곽에 머물렀다.

최근 'NLL 대화록' 논란으로 친노가 결집해 전면에 나서고, 천호선이 정의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다시 부활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한편 '사초 게이트'는 친노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친노이면서 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천호선 대표가 외면할 수만은 없는 형국이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