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기업인, 학자 등 세계 각국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각종 정보를 교환하고 향후 발전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는 다보스포럼이 시작됐다. 올해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재계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향후 경영권을 이어받을 후계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지명도를 높이고 글로벌 인맥을 구축하는데 최적화된 행사인 까닭에 너도나도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재계 후계자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이다. 2006년 다보스포럼에 처음으로 참가, 세계 무대에 얼굴을 알린 이후 올해까지 9년 연속 개근하고 있는 정 부회장은 2009년 '차세대 글로벌 리더'에 선정되며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최근 있었던 현대엠코-현대에니니어링 합병으로 후계구도 완성의 일보를 내디딘 정 부회장이 '포스트 정몽구' 시대를 맞아 글로벌 리더로 부상할지 주목된다.

순환출자구도 해결 '후계구도' 기반 마련

정의선 부회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하나로 묶여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재계 1, 2위 그룹의 황태자인데다 나이마저 비슷해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좋은 까닭이다.

정 부회장은 이 부회장보다 경영능력에서는 오히려 낫다는 얘기를 듣고 있는데다 얼마 전까지는 직급도 앞서 있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이 이 부회장을 부러워할 부분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대권 승계 문제다.

물론 정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까지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경영권을 위협할 만한 형이나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너무 잘 나가는 나머지 끊임없이 비교되는 여자 형제도 없다. 문제는 단 하나다. 후계구도 완성을 위한 실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중심으로 나머지 계열사들의 지분 관계가 얽혀 있다. 순환출자구조를 형성하는 핵심 계열사 중 정 부회장이 유의미한 지분을 보유한 곳은 기아자동차뿐인데 그마저도 미미한(1.74%) 수준이다.

정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핵심 계열사 중 지분 가치가 가장 낮은 현대모비스 지분(16.9%)을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5조원 정도의 자금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 부회장이 가지고 있는 현대엠코(25.06%), 현대글로비스(31.88%), 이노션(40.00%) 등의 지분가치를 모두 더한다 해도 3조원이 채 되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도 한꺼번에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현대엔지니어링과의 합병을 결정한 현대엠코가 주목된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엔지니어링과 현대엠코는 16일 오전 임시의사회를 열어 합병 안건을 통과시켰고 내달 27일 각사 주주총회를 거쳐 4월1일 통합법인으로 출범할 계획이다.

금융업계에서는 새로 출범하는 합병회사가 빠른 시일 내에 상장하거나 현대건설마저 추가 합병한 이후 우회상장할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당초 외형이 큰 현대엠코가 현대엔지니어링을 흡수합병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현대엔지니어링의 주식가치가 높다는 점을 감안, 엔지니어링이 엠코를 흡수합병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도 향후에 있을 상장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룹차원의 지원으로 합병회사의 덩치를 키운 다음 상장까지 거치게 되면 정 부회장의 주식가치는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현대엠코의 최대주주인 정 부회장은 합병회사의 지분 11.72%를 보유한 2대 주주가 된다. 정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글로비스 역시 합병회사의 주식 11.67%를 소유하게 된다. 합병회사의 지분을 매각하는 등의 방식으로 실탄을 마련,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하는 것으로 후계구도를 완성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럴 경우 정 부회장이 이번 정권 안에 승계작업을 마무리 짓고 '정의선 시대'를 완성할 것이라는 전망 또한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차근차근 단계 밟아 글로벌 리더 성장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의선 부회장은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할아버지인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글로벌 시대이니만큼 영어는 능통하게 해야 한다"는 권유에 따른 결정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을 때 평생의 반려자인 정지선 씨와도 본격적으로 교제를 시작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1997년 MBA 과정을 마친 정 부회장은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토추 상사 뉴욕지사에 취직했다. 미국에서 받은 경영수업을 바탕으로 향후 경쟁상대가 될 일본 기업들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기 위한 선택이었다.

1999년 한국으로 돌아온 정 부회장은 현대자동차에 입사,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상무로 입사했으니 재벌가 자녀로서 적잖은 혜택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후 행보는 조금 달랐다. 정 부회장이 처음 맡은 일은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었다. "자동차를 알기 위해서는 부품부터 알아야 한다"는 정 명예회장의 지론을 충실히 이행한 발걸음이었다. 이후 정 부회장은 영업지원사업부장, 국내영업본부 부본부장,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을 두루 거치며 영업과 기획 분야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경영수업을 받던 정 부회장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 것은 2005년 기아자동차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쓰러져가던 기아자동차를 보란 듯이 회생시킨 정 부회장은 2009년 8월 현대차그룹 부회장에 취임,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다.

재계 후계자 중 경영능력은 으뜸

정의선 부회장은 재계 후계자들 중 경영능력 면에서 가장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룹에 몸담은 지난 15년간 꾸준히 보여온 경영 성과가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그중에서도 기아자동차 사장 시절의 정 부회장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상을 보였다.

정 부회장이 기아자동차를 이끌게 된 것은 불과 36세였던 2005년이었다. 기아자동차의 대표 자리는 향후 경영권을 이어받을 젊은 후계자가 맡기에는 위험부담이 큰 자리였다. 만약 실패할 경우 "능력도 없으면서 오로지 핏줄만으로 재계 2위의 그룹을 물려받게 됐다"는 꼬리표가 오래도록 따라붙을 것은 물론 그룹 장악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몇 년째 성장이 정체돼 있던 데다 현대자동차의 서브 브랜드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던 회사라 정 부회장의 부담은 더욱 컸다.

기아자동차의 대반전은 정 부회장이 대표를 맡은 이듬해인 2006년 시작됐다. '디자인 경영'을 선포한 정 부회장은 현대자동차 못지않은 품질에도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던 기아자동차에 날개를 달아줬다. 삼고초려 끝에 유럽 3대 디자이너로 꼽히던 피터 슈라이어 사장을 영입, 속칭 '호랑이 코'로 불리는 기아자동차 고유의 디자인을 완성시켰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세계 완성차업계가 극심한 불황에 빠진 2008년 이후에도 기아자동차는 포르테, 스포티지R, K5, K7 등을 잇달아 선보이며 오히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각종 디자인상도 휩쓸었다.

기아자동차의 성공을 바탕으로 현대차그룹 부회장으로 금의환향한 이후에도 정 부회장의 고공행진은 계속됐다. 기획 및 영업 담당이라는 다소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됐음에도 글로벌 메이저 모터쇼가 열릴 때마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시장에 선보이는 신차들을 직접 소개하고 회사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도맡으며 그룹의 얼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정 부회장의 '모터쇼 경영'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주요 계열사들의 등기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내실 있는 경영에 나서기 시작, 더욱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엄격한 가정교육 효과 커

현대가는 엄격한 '밥상머리 교육'으로 유명하다. 정의선 부회장 또한 어려서부터 서울 청운동 정주영 명예회장의 집 식당에서 어른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며 하루를 열었다. 정 부회장을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사람이 무척 예의 바르다"라고 한 번씩 언급하는 이유도 어릴 적의 교육 덕분이다. 사내에서 나이 많은 임직원들에게 늘 예의를 갖추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부하직원에게도 함부로 하대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혼이나 별거 등 정 부회장의 사생활과 관련한 유쾌하지 않은 소문이 거의 들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재벌가 자녀답지 않게 격식을 따지지 않는 소탈함도 정 부회장의 특징이다. 실제로 정 부회장은 소주를 즐기고 김치찌개와 냉면을 즐겨 먹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이 유전적 가풍으로 내려오는 셈이다.

정 부회장의 경영스타일 중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인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슈라이어 사장의 경우에서도 미뤄볼 수 있듯이 정 부회장은 필요한 인재라면 회사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영입해 적재적소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잡페어를 열기도 하고 오디션 방식으로 해외 유학생을 채용하는 등 인재 영입을 위한 방법론도 자세히 고민하는 편이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점도 인재중시경영의 단면이다. 바쁜 일정 와중에도 직원들과의 번개 미팅을 갖기도 하고 부하 직원의 애경사는 꼭 챙기며 직원들과 스킨십을 가진다고 전해진다.

다보스포럼에서 눈길

정의선 부회장은 현재 다보스포럼에 참가하고 있다. 재계 3세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참석한 이번 다보스포럼에서도 정 부회장은 단연 눈에 띈다. 9년 연속 개근인 데다 2009년 '차세대 글로벌 리더'에 선정됐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재계2위 그룹 후계자로서의 관록이 붙었다고도 보는게 더욱 합당할 듯 하다.

정 부회장은 올해 첫 해외 출장지로 유럽을 선택했다. 다보스포럼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낸 뒤 유럽 전역을 돌며 제네시스 홍보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최근 들어 현대차그룹의 유럽 내 성장세가 한풀 꺾인 상황에서 정 부회장의 유럽행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 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의 후계자로서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거운 어깨를 이끌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정 부회장의 향후 행보가 더욱 주목된다. @hankooki.com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출생 1970년 10월18일

학력 휘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교 경영학 석사

경력 1999 현대자동차 구매실장

2002 현대자동차 국내영업본부 부본부장

2003 현대자동차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2003 현대모비스 부사장

2005 기아자동차 대표이사 사장

대한양궁협회 회장

아시아양궁협회 회장

2009 현대차그룹 기획 및 영업담당 부회장



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