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풍·3金부활 움직임 차단 등으로 정치지형 재편 의도 분석

도청정국에서 불거진 김대중(DJ)-노무현 전ㆍ현직 대통령 간의 내전이 최근 전면전 양상으로 비화하고 있다. 검찰이 15일 DJ 정부시절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임동원, 신 건씨를 불법도청 혐의로 구속한 게 도화선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현 정권이) 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며 노무현 정부를 향해 날을 세웠고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어 내고 있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불쾌감도 표시했다.

검찰의 칼끝이 김 전 대통령, 나아가 국민의 정부를 향하면서 정치권을 달구던 호남풍도 싸늘하게 식었다. 직전만 해도 여야 지도부가 호남의 상징인 김 전 대통령을 잇따라 방문하고, 전남도청 신청사 개청식(11월11일)에 참석하는 등 호남 구애에 열을 올렸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과의 통합논의는 노 대통령이 “창당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냈다.

그러나 임, 신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되면서 정치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여권에서는 사건의 본질과 노심(盧心)을 두고 이해가 엇갈렸고 한나라당은 불법도청에 대한 비난과 DJ 정부에 대한 공격 수위를 조절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직격탄을 맞은 민주당은 “김대중 정부 죽이기”라며 예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번 DJ 정부의 두 핵심 실세 구속은 다양한 정치적 후폭풍을 내포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태풍의 눈’은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과의 관계다. 정가에서는 두 사람의 화해가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게 중론이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 노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하면서 본격화된 양측의 갈등은 그해 10월 우리당이 민주당에서 분당돼 나와 신당을 창당하면서 골이 깊어졌다.

지난 8월 불법도청 수사는 김, 노 전ㆍ현직 대통령이 더 이상 화해가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갔다. 국정원은 8월5일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도청이 이뤄졌다”고 발표, 김 전 대통령측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대북송금이 정책 문제였다면, 도청은 DJ 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라며 충격의 심대성과 함께 여권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김 전 대통령이 8월10일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면서 내전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호남 민심 악화를 우려한 여권은 이해찬 총리와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 등 최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DJ를 방문해 ‘호남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국정원의 불법도청 의혹과 관련 임동원, 신건 등 DJ정부 시절 국정원장들이 14일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15일 저녁 전격 구속되면서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관계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됐다는 분석이다.

전·현정권 대립은 고도의 계산된 전략

정가에서는 현 정부가 김 전 대통령측을 강하게 공격한 배경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이 사건은 대통령이 파헤친 사건이 아니고 그냥 터져 나온 사건으로 터져 나온 진실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며 항간의 의혹을 불식하고 원칙 수사를 강조했지만 의문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일각에서는 참여정부 출범 후부터 점철된 김, 노 전ㆍ현직 대통령 간의 대립에서 더 큰 상처를 입은 쪽은 김 전 대통령이라는 점을 들어 노 대통령측에서 고도로 계산된 전략을 펴왔다는 해석을 제기한다.

이에 따르면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구속은 인권과 대북성과를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는 DJ정부를 정면으로 건드려 김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확대되고 있는 호남풍을 감쇠시키고 3김의 부활 움직임을 차단, 정치구도를 재편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최근 정가에서는 내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신DJP연대론’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과 우리당 이탈파가 규합해 세를 불린 뒤 중부권 신당과 통합하고 수도권의 고건 및 지지 세력과 연합, ‘호남+충청’ 세력이 다시 한번 정권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이 호남풍을 일으키고 있는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기 움직임을 보이고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국민중심당 창당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입김이 작용하는 등 3김의 부활 움직임이 감지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우리당과 민주당과의 통합론 이면에 여권내 잠룡 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호남 출신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측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강하게 공격한 것은 그러한 정치권의 흐름을 차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다. 청와대 출신의 한 초선 의원은 “최근 정치권의 움직임은 우리당의 창당 정신이나 참여정부의 이념과 상치되는 방향으로 진행돼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해 그러한 평가를 뒷받침했다.

지난 2003년 11월11일 창당선언문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 산업화시대를 이끌어온 양심적 주역, 새로운 시대정신과 전문능력을 갖춘 분들의 힘을 결집한다’고 밝혔고 첫번째 목표로 지역주의와 지역감정의 극복을 통한 국민통합정치의 실현을 꼽았는데 통합론이나 3김의 부활은 그에 정면 배치된다는 게 초선 의원의 설명이다.

당내서 정동영계로 분류되는 중진 의원은 “최근 불고 있는 호남풍에다 내년 우리당의 2ㆍ18 전대를 전후 해 정동영 장관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전면에 나설 경우 대선국면에 따른 조기 레임덕을 우려해 사전 방지용으로 호남의 상징인 김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동진정책 위한 DJ 흠집내기 분석도

다른 일각에서는 4ㆍ30 재보선(경북 영천)과 10ㆍ26 재선거(대구 동을)에서 우리당 후보가 40% 이상을 득표, 영남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노 대통령측이 ‘호남은 어떤 경우에도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는 전제 아래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는 분석을 제기한다.

즉 차기 대선과 관련, 김 전 대통령 대신 노 대통령(또는 여권)의 호남 지배력을 강화하고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충청권 지지로 호남-충청-수도권으로 이어지는 서부 벨트를 장악하는 한편, 꾸준한 동진(東進)정책으로 영남에서 선전하는 구도를 짜놓으면 웬만한 후보를 내도 승산이 있다는 계산에서 호남의 상징(DJ)에 흠집을 냈다는 해석이다.

김 전 대통령측에서 “DJ 정부의 도덕성 문제를 부각시켜 결국 DJ 정권과 절연하려는,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밑그림일 수 있다”는‘음모론’은 그래서 나온다.

김, 노 전ㆍ현직 대통령의 갈등에서 공(선택)은 김 전 대통령에게 넘어 온 상태다. 노 대통령과 계속 맞설지, 아니면 불법도청 사실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화해를 모색하느냐는 전적으로 김 전 대통령에 달렸다.

하지만 여론은 노 대통령의 강수에 대한 비판보다 김 전 대통령이 불법도청 사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노 대통령측의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결과는 성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정국에 미칠 후폭풍도 점차 거세질 전망이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