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방안, 6·15 선언과 배치

한미 양국이 <통일 한국은 남한이 주도하고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한다>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한미동맹 미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를 2002년 공동 작성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보고서(15일자 한국일보 보도)는 특히 한반도 통일을 화해협력-평화공존-통일 3단계로 상정했다. 이는 과거 김대중 정부가 마련했던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이란 3단계 방식과는 달리 ‘남북연합’ 단계를 거치지 않고 남한 주도로 통일을 구상했다.

이는 ‘남한의 연합제 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하겠다”고 밝힌 2000년 6ㆍ15선언과도 배치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보고서는 또한 ‘통일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통일이 된 한국은 법치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남한이 주도”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한미 양국이 추구하는 통일방식이 ‘흡수 통일’임을 확인하고 있다.

통일단계의 우려사항과 관련 △북한 내 사회적 소유 및 통일에 대한 일부 북한 구(舊)정권 수혜세력의 저항 △북한주민의 남한 대량 유입에 따른 한국 내 사회 혼란 등을 열거하며 ‘흡수 통일’과 관련된 비상사태까지 상정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에 대해 폭 넓은 분석과 현안, 우려 사항 등을 망라한 보고서 작성은 1999년 피터 페이스 미 국방부 차관이 세계안보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한미동맹의 조정을 협의할 필요성을 제기한 데서 시작됐다.

2년간 양국 국방당국 실무진의 논의를 거쳐 2002년 정리된 이 보고서는 그 해 12월 5일 이준 국방부 장관과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이 참석한 제3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교환된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에 관한 약정서(TOR)’의 밑그림이 됐다.

DJ 이어 현 정부 한미동맹 기본틀로 작용

더욱이 이 보고서가 당시 군사 당국간에 진행된 협의의 산물일 뿐이라는 일부의 해석과 달리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의 한미동맹 재조정 협상에서도 기본 틀로 작용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난해 4월 한미 안보정책구상회의(SPI) 우리측 수석대표인 안광찬 국방부 정책본부장이 “남북관계를 화해협력-평화공존-통일 단계로 나눠 한반도 안보 시나리오를 작성 중”이라고 말한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보고서에 나온 남북관계 발전단계와 일치한다.

국방부는 15일 “개념 차원에서 한미 국방실무자 간 2년동안 연구된 보고서로 최근 양국의 안보현안 논의 과정과는 무관하다”라고 해명했으나 사실상 2003, 2004년 미래동맹정책구상(FOTA)에 이어 지난해부터 시작한 SPI의 ‘미래 한미동맹의 청사진’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2002년 보고서와 상당 부분 맥을 같이하고 있어 주목된다.

현 정권 들어 한미동맹 조정 협상에 기존 국방부 관계자뿐만 아니라 외교부 실무자가 참석한 FOTA, SPI에서도 2002년 보고서의 기조가 유지된 점은 단순히 그 보고서가 국방실무자 간의 ‘개념’확립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또 전문가들은 새로운 한미동맹의 핵심 키워드인 ‘전략적 유연성’ 개념도 2002년에 합의 작성된 보고서에 이미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평화공존’ 단계에서 “한반도 방위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 수행을 준비”하고 ‘통일’ 단계에서 “한반도 방위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로 전환 완료”를 단계적으로 구상하고 있다.

2월 13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들이 용산 국방부 앞에서 한미동맹 안보정책구상(SPI) 제6차 회의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조영호 기자

이는 한국군이 한반도 방위를 전담하고 주한미군은 지역 방위 역할을 담당하는 ‘전략적 유연성’의 기본 개념과 같다.

2003년에 확립된 것으로 알려진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1999년 논의를 시작해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이 반영된 2002년 보고서에 이미 들어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김대중 정부는 한미동맹 미래 구상에서 당초의 남북관계 발전 방안을 이처럼 수정하게 됐나?

일각에서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만든 제34차 SCM의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에 관한 약정서’의 교환 시기가 2002년 12월인 점을 들어 김대중 정권 말기의 레임덕과 연관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 6ㆍ15 선언으로 구체화한 DJ의 통일방안 원칙이 2001년 9ㆍ11 테러 계기로 불가피하게 굴절됐을 가능성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또한 한미동맹의 공개적인 파열음을 꺼려했던 당시 정책 결정자들이 미국측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초 ‘동북아 균형자론’를 거론해 한미 동맹에 일순 긴장감이 일었지만 결국 지난달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최종 수용하게 된 배경도 이미 1999년에 시작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조성렬 박사는 “한미동맹의 새 틀인 전략적 유연성의 논의가 노무현 정부 들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2002년 ‘한미동맹 미래공동 협의 결과’ 보고서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말했다.

평화협정 당사자 북-미 아닌 남-북

보고서의 일부 내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정되기도 했다. 보고서는 남북관계의 평화공존 단계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대화의 당사자를 북-미가 아닌 남-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북핵 6자회담 9ㆍ19 공동성명에서는 보고서의 구상과는 달리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은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한미 양국은 14, 15일에도 괌에서 제6차 SPI를 개최,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 등을 논의했다.

전략적 유연성,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전시작전권 이양 등 굵직한 현안들의 조율을 통해 그려질 한미동맹의 미래 청사진이 2002년 보고서와 비교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