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호남 가야 연구 권위자 곽장근 교수

“전북 가야는 철의 테크노밸리였다. 가야사 중심 바뀔 가능성 높아”

군산대 곽장근 교수, 가야 무덤, 제철유적, 봉수, 산성 600여개 발견

1982년 호남 가야 실체 드러났지만 묻혀

가야사 복원 제대로 된다면 세계유산 등재는 수순

본래 가야사 영호남 화합과 상생의 길 보여줘

기존 가야사 인식에 벗어난 균형적 지원 절실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예상치 못한 발언을 했다. 문 대통령은 “약간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는 있는데”라며 “지방정책 공약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포함시켰으면 좋겠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서 “통상 가야사가 경남을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역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더 넓다. 가야사의 복원은 아마 영호남이 공동사업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어서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으로 생각한다”며 가야사 복원 사업을 정책 과제에 포함시켜 줄 것을 당부했다.

지금까지 국민들은 가야사에 대해 김해, 고령 등 영남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가야사에 대한 복원사업도 이 지역을 위주로 진행돼 왔다. 하지만 대통령이 언급한 가야사 복원 사업 추진의 의도가 영호남 화합 차원으로 밝혀지면서 호남 지역 가야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호남 지역 가야사 연구는 얼마나 진행됐으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1982년 호남 가야 실체 드러났지만 묻혀”

30년 넘게 전북 지역에서 가야사를 연구한 군산대 곽장근 교수는 먼저 문 대통령의 가야사 언급에 대해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는 “가야는 영호남 구분 없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써 내려간 위대한 고대사”라며 “대통령이 던진 가야사 화두는 시기적절하고 환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곽 교수에 따르면 호남 지역 가야가 처음 알려진 시기는 1982년이었다. 당시 88고속도로 공사 구역에서 고분이 발견됐는데 가야계 고총으로 밝혀지면서부터다. 그 이후 가야사에 대한 진전은 크게 없었다.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350여기의 왕릉급 고총·고분과 계북∼번암 간 40여㎞에 걸친 호남지방 최대 규모인 150여 개의 제철유적, 80여 곳의 삼국시대 유일의 봉수유적, 10여 곳의 고대산성이 확인되면서 호남 가야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곽 교수는 “영남 지역 가야는 30~40년 동안 연구가 진행됐지만 호남 지역 가야는 이제 첫 걸음을 뗐다”며 “발굴 조사가 진행된다면 가야의 중심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전북 가야사 연구의 권위자 군산대 곽장근 교수를 통해 가야사 연구 진행 현황과 가야사 복원 사업의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영남에 비해 호남 지역 가야사가 덜 알려진 이유가 뭔가.

“상대적으로 늦게 발견됐기 때문이다. 김해, 고령 등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일찍 연구가 시작됐다. 하지만 호남 지역은 1982년이 돼서야 가야의 실체가 드러났다. 당시 광주와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 공사 구역이었던 남원 월산리에서 봉토의 지름이 20m 내외의 10여 기 고분이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는 백제계 대형 무덤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발굴이 시작되고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면서 가야계 고총으로 밝혀졌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 도굴의 피해는 심했지만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의 가치는 탁월했다. 유적의 규모와 출토된 유물의 의미로 봤을 때 강력한 힘을 가진 가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1982년 최초 발견 이후 조사는 어떻게 진행됐나.

“주로 유적을 찾고 알리는 지표조사 위주로 가야사 연구가 이뤄졌다. 전북에서의 역사인식은 마한, 백제 중심이다. 가야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부족하다보니 발굴조사가 거의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다. 1982년 발견된 남원 월산리 고분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원 없이 고고학자들의 열정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고 보면 된다.”

-현재까지 밝혀진 호남지역 가야 연구 현황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전북 동부 지역의 고총, 제철유적, 봉수, 산성이다. 가야의 지배자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총이 430여 기다. 직경이 20m 정도로 운봉고원 180여 기, 장수군 일대 250여 기가 발견됐다. 철광석을 녹여서 철을 생산했던 제철유적은 150개소 정도로 대규모 제철단지였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도 유일하게 발견되고 있는 봉수유적 30여 곳, 방어 시설인 고대산성도 10여 곳 발견됐다.”

-역사적 의미가 높은 유적은 어떤 것인가.

“제철 유적이다. 가야의 중심인 영남에서 왕릉급 고분을 집중적으로 발굴해 출토된 유물들이 철기유물로 밝혀져 가야가 철의 왕국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영남에서 현재까지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는 제철 유적은 학계에 거의 보고된 바가 없다. 반면 전북 지역에는 150여개의 제철유적이 발견됐다. 그 중 현재 장수 대적골 제철유적 1개소를 발굴조사 진행 중이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다. 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흔히 쇠똥이라고 부르는 슬래그의 분포 범위가 1.5km에 달한다. 학계에 보고된 제철유적 중 최대 규모다. 제련로 부근에서 뿜어내는 슬래그 더미는 5m를 파도 바닥이 안 보일 정도다.”

-철 생산지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물경제의 중심이자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철은 생산자가 팔러 다닐 필요가 없다. 철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물건을 갖고 생산지를 방문해 철로 바꿔가는 방식이다. 때문에 철은 곧 힘을 상징하고 철을 생산했던 집단은 중심세력을 이룬다.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중국계 청자 계수호(鷄首壺)가 남원 월산리 M5호분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나라의 위상이 높았다는 의미다. 철을 생산했던 전북 가야는 가야의 변방, 지방이 아니라 중앙 지역일 가능성이 있다.”

-전북지역에서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철은 세 가지가 필요하다. 원료인 철광석, 연료인 숯, 그리고 선진기술이다. 전북 동부에 분포하는 돌은 모두 니켈이 함유된 최상급의 철광석이다. 여기에 전북 동부를 관통하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다. 숯을 구하기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또한 선진기술을 갖고 있던 제나라 전횡과 고조선 준왕이 이 시기 전북지역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철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을 것이라 본다.”

-전북가야에서 발견된 철기의 수준은 어떤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최고 수준의 주조기술이다. 남원 월산리 고총에서 발견된 금은상감 환두대도 손잡이편을 보면 철을 파내 그 안에 금과 은으로 거북이 등껍질을 묘사한 꽃과 물결무늬를 새겼다. 장수 지역 고분에서는 말발굽인 편자도 발견됐다. 주인이 죽자 함께 묻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말이 달리는 속도와 무게, 압력을 이겨냈다는 의미다. 두 유물 모두 다른 가야계 고총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유물이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운봉고원이 철의 생산부터 주조기술까지 응축된 당시 철의 테크노밸리였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른 유물은 무엇인가.

“80여 곳의 봉수 유적이다. 봉수는 변방의 위급한 상황의 중앙의 왕에게 알리는 통신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를 통틀어 봉수가 발견된 곳은 전북 동부뿐이다. 가야의 봉수로 해석하는 이유는 봉수 주변에 가야 시기의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 전과 후의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문헌에도 봉수의 실체가 나와 있다. 일본서기에는 가야계 소국인 반파라는 나라가 백제와 3년 전쟁(513년~515년)을 펼치면서 봉수를 운영했다고 상세하게 기술돼있다. 그 시기 봉수가 발견된 곳은 전북 동부밖에 없다. 중요한 점은 봉수의 종착지가 장수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봉수의 종착지를 장수로 해석하는 이유는.

“봉수는 봉수로가 설정돼야 한다. 복원된 봉수로의 종착지가 장수다. 다만 현재까지의 정설과 통설은 고령 대가야를 반파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북 동부의 봉수가 고령까지 이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북 동부를 지나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대가야의 옛 도읍인 대가야읍 사이에는 봉수가 없다. 물론 앞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하는 부분이다. 현재 발견된 봉수는 전북 무주, 진안, 임실, 순창, 남원, 충남 금산까지 분포돼 있다. 전북 동부의 가야 영역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가야사 연구가 영호남 화합을 도모할 수 있나.

“가야시대에는 영ㆍ호남이 없었고 서로 교류와 교역을 하면서 역사를 썼다. 전북 동부에서 영남으로 철을 보내면 토기를 보내는 등 서로 존중하며 배려한 흔적이 많다. 역동적인 교류를 하며 영호남이 상생하는 역사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철의 왕국이 발전했는지는 학자들이 밝혀야 하는 과제다.

문 대통령의 생각도 같을 것이라 본다. 가야사 복원을 통해 영호남이 하나의 역사 속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인식하게 된다면 영호남 화합과 상생의 길은 멀지 않았다. 백제, 신라와 영향을 주고 받았던 가야에 대한 연구를 백제사, 신라사 학자들도 함께 한다면 한반도 고대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장수군이 가야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추진 중이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다. 세계유산 지정 현황을 보면 현재 1050여건이 등재돼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도 고대 제철유적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없다. 전북 가야는 세계유산 등재 기준인 진정성, 탁월성, 역사성 등 많은 조건에 부합한다. 또한 세계유산의 여러 조건 중에는 ‘보호 및 관리체계’ 항목이 있는데 전북 동부의 가야는 백두대간 보호법과 국립공원 관리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특별한 입법절차가 필요하지 않은 셈이다. 더 나아가 이 지역 일대는 세계복합유산의 가치도 품고 있다.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백두대간에 위치한 전북 가야는 그 속에 철을 중심으로 신앙, 역사, 예술, 문화가 모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복합유산 박물관이라 보면 된다. 여기에 현재 세계유산에 등재된 총 12건의 우리나라 세계유산 가운데 자연과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곳은 없다. 김해·고령·함안은 2015년 문화재청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됐는데 무덤에 관한 이야기다. 그에 비해 전북 동부 가야는 무덤, 제철유적, 봉수, 산성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가야사를 온전히 복원한다면 세계유산 등재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의 언급 후 가야사 복원사업 관련해 지자체간 예산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홀대받았던 가야사에 대한 관심 측면으로 보면 긍정적인 움직임이다. 앞으로 위원회가 꾸려지고 전문가들의 논의가 진행된다면 예산 경쟁과 같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본다. 중요한 점은 가야사 복원에 대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종래 가야사 인식을 기초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야사가 전체적으로 지원을 적게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영남지역은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복원되고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호남 지역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단적으로 전북 동부 지역에서 가야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유물, 유적이 없다. 사적으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발굴조사 및 학술대회를 거쳐야 하는데 그럴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가야사를 복원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영남 중심의 가야사 인식에서 탈피해 형평성과 균형성을 갖춘 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가야사 복원 사업의 내용이 충실해지고 올바르게 가야사를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사 연구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사실이다. 현재 호남에서 가야사를 논문으로 다룬 학자들은 크게 보아 10명 내외 수준이다. 전국으로 넓혀 봐도 타 역사 연구 인력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현재 석사 학위 이상의 학자들이 중견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고 국가에서 가야사에 대한 지원이 시작된다면 학부생, 대학원생의 관심이 이어질 것이다. 또한 가야사 복원 사업은 단기적으로 끝낼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 인력 양성은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 모든 일이 똑같지만 희망과 빛이 보여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정부의 관심이 가야사 복원의 첫 걸음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간 고고학자의 젊음과 열정으로 발품 팔아 산속을 뒤지며 유적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1500년간 잠들었던 유적들을 하나씩 깨워 가야의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지표조사로 실체를 확인한 단계일 뿐이다. 가야사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하는 역사다. 앞으로 이어질 발굴조사를 통해 고고학적 자료가 쌓이면 진정한 철의 왕국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하다. 하지만 밝혀질 전북 가야의 모습을 상상하면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연구에 더욱 매진해 국민들에게 가야사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린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남아있는 자의 몫이자 의무이다.”

허인회 기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