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사진=연합뉴스 제공)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대표팀이 왕세자가 한달간 기록한 승리를 마무리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11월 전세계를 휩쓴 사우디아라비아 ‘모래바람’의 위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2022년 11월은 사우디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전망이다.

오일 머니를 앞세운 사우디는 이제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핵심 국가로 부상하며 과거와 달라진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때마침 월드컵에서 사우디 대표팀이 축구 황제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를 제압한 엄청난 승전보는 이번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덩달아 사우디 국가 개조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위상도 어느 때보다 치솟고 있다. 향후 국제 외교 경쟁에서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변화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사우디는 올해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야기한 에너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과거 미국의 요구에 철저히 수긍하던 사우디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기대던 모습은 과거일 뿐이다. 오히려 미국에 맞서며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한다. 이런 기회를 맞아 중동과 아시아에서 열린 국제 외교무대에 연이어 나선 빈 살만 왕세자는 가는 곳마다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빈 살만 왕세자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11월에 열린 국제 다자외교 무대에서 빈 살만 왕세자는 그야말로 '인싸'였다. 마침 중동과 이슬람 국가에서 연이어 대규모 외교 행사가 열린 것도 빈 살만 왕세자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같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 27),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카타르 월드컵이 11월에 몰리면서 빈 살만 왕세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각국을 누볐다.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도 참석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에 24시간도 머물지 않았지만 우리 정부는 국무총리가 공항에 영접을 나갈 만큼 극진히 대접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도 나왔다. 미국에 투자해 조 바이든 대통령의 환대를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나란히 한 소파에 앉아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는 모습은 결정적 장면이다. 빈 살만 왕세자가 40조원에 달하는 네옴시티 사업을 앞세운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번 순방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 터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도 만났다. 월드컵 개막식에서는 행사의 주빈인 국제축구협회(FIFA) 회장이 빈 살만 왕세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뿐이 아니다. 연내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두바이 주재 중국 총영사는 양국은 12월 초 사우디에서 제1차 중국-아랍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마침 다음달 4일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OPEC 산유국 협의체인 오펙 플러스(OPEC+) 회의도 예정돼 있다. 왕세자와 시 주석의 만남이 OPEC+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사우디를 외톨이로 만들겠다던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공약을 기억하는 미국의 동맹국들은 없는 모습이다. 지난 7월 바이든은 사우디 외톨이 공약을 포기하고 사우디까지 날아가 석유 증산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사우디의 답은 거절이었다. 오히려 지난 10월 사우디는 OPEC+국가들과 함께 원유 일일 생산량을 200만배럴 줄이기로 결정했다. 사우디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미국은 즉각 반발했다.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유가 안정이 필요하지만 사우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급기야 미국은 러시아와 동조하는 것이라며 노골적인 유감을 표했을 정도다. 사우디와의 동맹관계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어느새 꼬리를 내렸다.

미 국무부는 최근 양국 관계 악화의 시발점이 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관련 소송에서 빈 살만 왕세자에게 면책 특권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 확인됐다. 왕세자가 사우디 정부의 수반인 총리가 되면서 뒤따른 국제법상 관행일 뿐이라는 입장이라는 게 미국 측 설명이지만 사우디에 대한 유화적 조치라는 것이 통상적인 시각이다.

이렇든 빈 살만 왕세자는 가는 곳마다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었다. 이제 빈 살만 왕세자를 외톨이로 만드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다. 영국 버밍엄 대학의 사우디 정치 전문가인 우마르 카림 교수는 빈 살만 왕세자의 최근 행보에 대해 "빈 살만 왕세자의 이번 여행은 아시아 에너지 시장과의 협력을 심화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 본질적으로 미국에 사우디가 국제사회에서 파트너십 측면에서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특히 미국을 제치고 자국 원유의 핵심 소비국으로 부상한 아시아 지역과의 관계 강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석유에 기반한 미-사우디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카림 교수는 또 “사우디의 외교정책이 조수의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플레이어가 되는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왕세자의 카타르 방문도 눈여겨봐야 한다. 사우디는 카타르와 국교 단절한 후 지난해 국교를 재개했다. 중동 국가들의 카타르 봉쇄를 주도했던 왕세자가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했다는 것과 사우디가 아르헨티나 전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지켜본 카타르 국왕이 사우디 국기를 흔든 것은 중동 세력의 변화로도 읽힌다. 태국 방문도 비슷한 경우다. 1989년 악화된 양국관계가 마침내 회복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