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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시대 개막, 경영혁신 몰고 올 '철의 여인'
책임경영 원칙에 따른 소유·경영분리로 또다른 지배구조 실험

‘철의 여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시대가 열렸다.

현 회장의 비서 겸 홍보담당 홍현주 현대그룹 과장은 그녀의 이름 앞에 ‘철의 여인’이라는 문구를 단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처럼 여성이지만 강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일부러 강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인지 아직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현대그룹 안팎의 평가로는 둘을 모두 아우르고 있단다.

현대그룹의 지주 회사인 현대상선과 현대아산 주총에서 현 회장이 신임 이사로 선임되면서 ‘포스트 MH(정몽헌)’체제가 급격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대그룹 현 회장 시대의 개막은 재계에 남다른 의미를 던진다. 현 회장의 때 묻지 않은 깨끗함과 참신성이 분식 회계와 비자금 소용돌이로 얼룩진 현대그룹의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기업 지배구조 개편과 경영 체계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올 것이라는 기대다.


- 오너ㆍ전문경영인 ‘투톱 시스템’ 전망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김동호 기자



우선 현대그룹은 앞으로 오너와 전문 경영인이라는 ‘투 톱 시스템’을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 회장은 경영은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고 계열사 이사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천명해왔기 때문이다. 오너를 대표해 현 회장이 상선 등 주요 계열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대표이사는 전문경영인이 맡는 구도다. 현기춘 현대그룹 경영전략팀 전무는 “4월중 그룹의 새로운 비전과 경영체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발표할 예정이지만 현 회장이 주요 계열사의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전문경영인을 감시하는 투 톱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라며 “상선으로 지주회사가 재편되기 전까지 당분간 엘리베이터가 지주회사의 역할을 맡게 되며 남북경협을 주관하는 아산은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의 이 같은 지배구조는 SK의 지배구조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그 안착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 회장의 그룹 장악력도 한층 강화된다. 주총 이후 그룹 총수로서, 또 이사회 의장으로 경영권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강한 의욕을 실행에 옮길 태세다.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의 역할을 그대로 물려 받음으로써 그룹 정통성 계승이라는 명맥도 이어간다. 여기에다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이사에 선임될 경우 상선과 아산 이사였던 정 회장보다 활동의 폭은 오히려 확대되는 셈이다. 또 실질적인 지주 회사인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그룹 재편작업도 빨라질 움직임이다.

문제는 전문경영인에 대한 견제와 통제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 시절 전문경영인의 지나친 발호가 그룹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세간에 평가에 비춰 현 회장이 앞으로 전문 경영인과의 역학 구도를 어떤 식으로 가져갈지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시숙부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이 “그룹의 부실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며 가신그룹을 강하게 불신하고 이를 경영권 분쟁의 명분으로 삼았던 점을 현 회장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현 회장은 그룹 장악력을 강화하되 책임 경영 원칙아래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 “그룹 조정자 역할에 주력할 것”

현 회장 시대의 개막은 현대그룹에겐 또 다른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현 회장의 깨끗하고 참신한 이미지와는 달리 ‘경영 무면허 운전자’라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만만찮다. 또 재계 일각에서는 결국 그룹의 얼굴 마담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제한적 역할론을 편다. 물론 지금 상황은 현 회장이 여성 경영인으로 실질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보다는 흩어진 그룹의 역량을 모아주는 상징적인 구심점의 역할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득을 취하는 ‘무위(無爲)의 경영기술’이 지금 상황에서는 전문 경영인들의 책임경영과 이사회 중심의 투명경영을 진작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환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현 회장은 수 차례에 걸쳐 “계열사의 경영은 전문경영인과 이사회에 맡기고 본인은 그룹 회장으로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 회장이 일선에서 기업경영을 담당한 경험은 없으나, 친정과 외가 등 사업가 집안에서 성장했고 고 정 회장 생전에도 그룹 경영에 높은 관심을 가져왔다”며 “정 회장 사망이후 법조ㆍ경영ㆍ학계 각 분야에서 조언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전문 경영인들과 함께 그룹을 잘 이끌어갈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고 우려감을 일축했다.

현 회장은 올해로 49세다. 지난 8개월,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망과 그룹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면서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할 만큼 호된 시련과 혼란을 겪었다. 어느 때 보다도 심리적 압박감이 컸던 ‘아홉 수’의 위기를 넘긴 셈이다. 그는 올해 초 새해 소망을 묻는 질문에 그룹의 경영권 안정을 첫번째 소망으로 꼽은 반면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살을 빼고 싶다고 덤덤히 말했다. 현 회장은 요즘 현대상선 건물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걸어 오르는가 하면 귀가 중 승용차에서 내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부터 성북동 집까지 걸으며 명상을 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다.

- 절제되고 진중한 자세로 신망 쌓아가

회색과 검정 톤의 수수한 단색계열 옷을 즐겨 입지만 현대상선 이사회 때는 파격적으로 청보라색 투피스를 입고 나와 향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했다.

“최고 경영인으로 현 회장의 현실감각과 대응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것이 주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 회장은 한 마디 한 마디 말하기 앞서 심사 숙고하는 진중한 모습을 보인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표현은 되도록 간결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비서진들과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지만 공식석상에서는 항상 긴장감과 조심스러운 자세를 잃지않는다. 현 회장은 올해 초 기자회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았다. 현 회장은 또 “정 명예회장의 강한 추진력에 대해 흔히 ‘저돌적’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정 명예회장은 어떤 일을 추진하기까지 남모르게 상당히 많은 생각과 고심 끝에 결정하고 일을 진행할 때 과감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아마도 정 명예회장을 닮으려는 그녀의 노력이 경영 신조가 되어가고 있는 지 모른다.

대기업 사모님의 이미지와는 달리 소탈한 성격에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도 그녀의 장점이다. 심지어 비서진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챙겨주는 것에 대해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반면 자녀들에 대한 현 회장의 교육태도는 개방적이라는 것이 지근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설명이다. 현 회장의 가장 가까운 말벗은 현대상선 재정부에서 근무하는 큰딸 지이씨.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연세대를 거쳐 외국계 광고회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한 그녀는 어머니 현 회장이 고민이 있을 때 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조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현 회장 비서진들의 전언이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 2004-03-3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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