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작품이 세상 논리 밖에서 탄생하듯 오늘도 패배를 위해 '플레이볼'

누군가가 ‘야구는 희생이 기록되는 유일한 스포츠'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스포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희생이 있는 스포츠, 더구나 그것이 기록되는 스포츠엔 뭔가 인도적인, 혹은 인문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가?라는 것이 야구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왠지 글쓰기 방식과 닮아있다.

많은 문인들은 스스로를 작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파는 상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숙명 지어진 일정한 몫의 ‘자기희생’이 있고 그걸 기록한다는 공통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긴박감이 육박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왠지 느슨하게 맥이 풀리면서도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것. 야구라는 스포츠의 문학성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방식이 닮았다고 해서 그 궤적도 동일하리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왜냐하면 야구는 (거의 국민 스포츠인) 축구에 비해서 자금이 많이 드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인들이 비루한 건 변함이 없는데,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가 어느 날 갑자기 돈 없는 문인들과 친해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인들로 구성된 축구팀은 꽤 있지만, 문인들로 구성된 야구팀은 아직까지 없었다. 주변의 문인들 대중 야구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선수’이기보다는 ‘관중’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 그러한 부분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야구에 빠진 문인들이 있다.

근래 나온 여태천의 시집 ‘스윙’은 ‘야구에 의한’ ‘야구를 위한’ 시집이다. 프로야구 중흥기에도 이런 시집은 나온 바가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야구에 대한 승리의 미학이 아니라 패배의 미학을 풀어놓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번에도 중견수는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볼을 놓쳤다.//조명 탑의 불빛 속으로 사라진 볼,/뻔히 눈 뜨고도 모르는 사실들./ 판단에도 경계라는 게 있어/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의 자리가 있다.//(중략)//적당한 높이에 마음을 걸어 두면/어두워서 뚜렷해지는 생각들./모두 플라이아웃이다.’(플라이아웃), ‘승패와 관계없는 몇 개의 게임이/남아있었다.//(중략)//포물선을 그리며/맥주 캔이 날아왔다./더그아웃에서 우리는 진짜 프로였다.’(더블헤더)

승패가 이미 갈렸어도 희생번트를 댈 수 있는 게 야구의 미덕이라는 것을 시인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운드보다 더그아웃의 공기가 더 야구를 야구이게 한다는 것 역시.

그러나 실제로 야구를 한다는 것은 야구에 대한 생각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단의 특이점 하나가 발생했다. 아마도 최초일, 문인야구단의 탄생이 그것이다. 팀의 이름은 ‘구인회(球人會)’. 물론 1930년대 김기림, 이효석, 유치진, 이태준, 정지용 등이 만든 문학단체 구인회(九人會)에서 이름을 빌려왔을 것이다.

2008년 가을에 만들어진 이 문인야구단은 현재 박형준(시인), 박성원(소설가), 조강석(평론가), 여태천(시인), 김태용(소설가), 박상(소설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참여하고 있는 문인의 면모가 화려하다.

하지만 비극적(?)인 건 그들이 실력일 터인데, 야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직장인 야구는 이런 식이다. 25:16 (실제 구인회 패 경기 기록이다.) 얼핏 핸드볼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득점 스코어가 나온다. 투수는 마구 두드려맞고 타자는 마구 쳐댄다.

그리고 에러가 난무한다. 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날 수 밖에 없는 엉성한 구조인 것이다. 문인야구단은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나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직업이 글 쓰는 것이니만큼 그 벌이에서 계산되는 열악함은 쉽게 상상이 간다.

즐거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린 너무 늙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즐겁지 않다. 밥값하기도 힘든 원고료 받아서 배트와 글러브, 장비 사는데 모두를 쓸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역설적으로 문학과 야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슷해진다. 많은 전업작가의 경우, 말도 안되는 연봉으로 살아가면서도 돈 때문에 펜을 놓겠다는 작가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조기축구회처럼 건강과 친목에 무게를 두는 것도 아니라면 야구, 이것의 정체는 아마도 작가가 글을 쓸 때의 그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건 늘 패배의 순간이고, 하고나면 (머리든 팔이든) 늘 쑤신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소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야구를 몰랐다. 내 친구들도 아빠도 엄마도 몰랐다. 선생님조차 몰랐다. 할 수 없어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야구(사어·死語): 아주 옛날에 죽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지면에 네모난 것을 놓고 악귀를 쫓았다.”

곧바로 나는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쳐 보았다. 아빠의 낚싯대로 2중 딤플로 된 골프공을...거 참 나는 이런 것을 재미있어 한 고대인의 심정을 알 수가 없다.’

결국 문학이든 야구든 우린 재미없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문인이고 직장 야구인이라면 이 난감한 처지를 이렇게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아마도 ‘지루한 세상을 향해 빨래줄 같은 타구를’ 영영 날리지 못할 거야. 언제나 패배가 확실해진 게임의 9회를 살고 있고, 그리고 외야측 담장을 넘어간 파울볼처럼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서 뒹굴고 있을 거야. 거 참, 나는 이런 것을 재미있어 한 나 자신의 심정을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오늘도 패배를 위해 문인들은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친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듯 세상의 논리 바깥에서 탄생하는 것이고, 작가의 플라이아웃은 그래서 아름답다



조연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