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비평고원 10>2만여 개 글 추려 인터넷 카페 창립 10주년 기념 문집 출간

지난주 1072페이지의 비평서 한 권이 출간됐다. <비평고원 10>. 대학 논문판형인 크라운판의 두툼한 이 책은 원고지 약 7000매에 달하는 두꺼운 책. 문학에서 예술, 철학, 정신분석, 일상, 시사쟁점, 해외 소식 등 다양한 주제가 펼쳐진다.

누가 이렇게 썼을까? 글 꽤나 읽고 쓴다는 독자는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은 인문학커뮤니티 '비평고원'의 회원들이 십시일반 글을 모아 낸 책이다. 그간 카페에 오른 2만여 개의 글을 추리고 엮었다.

대중지성의 장, 비평고원

대중지성. 포털사이트 다음의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cafe.daum.net/9876)'만큼 이 말에 적확한 모임은 없을 듯하다. 이 카페는 철학, 문학, 영화 등 한국에서 유통되는 인문학과 예술에 관한 거의 모든 콘텐츠를 비평한다. 익명의 공간에서 계급장 떼고 겨루는 담론 논쟁을 구경하다 보면, 흡사 무림 고수들의 승부를 연상케 한다.

2000년 4월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란 이름으로 개설한 이 카페는 애초에 밀란 쿤데라와 가라타니 고진의 팬 카페처럼 운영되다 카페 운영자가 자신의 비평문을 하나 둘 올렸고 회원들이 이에 가세하면서 2004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6월 말 현재 회원 수는 1만 394명, 대중지성의 근거지로 주목 받았다.

운영자 조영일 문학평론가
책 <비평고원 10>은 이 카페 창립 10주년을 맞아 낸 기념 문집이다. 주요 저자는 45명이지만, 댓글까지 포함하면 필자 수는 100명을 넘는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책은 인문학 서적, 한국문학과 외국문학 작품, 영화, 번역 등 다양한 주제를 논쟁의 주제로 삼는다. 블로그가 1인 운영의 일방향적 소통이라면, 인터넷 카페는 쌍방향적 대화에서 오는 담론 생성이 가능하다.

'4부 논쟁의 고원'은 이런 인터넷 글쓰기의 전모를 보여준다. 지난 10년 운영 기간 중 벌어진 다양한 논쟁 중 대표적인 사례 3개를 꼽아 길고 유려한 비평부터 반론, 반론의 재반론, 인신공격성 짧은 댓글까지 논쟁 이슈와 관련돼 게시판에 올라온 모든 글을 망라해서 소개했다.

카페 운영자인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는 "블로그북(Blook)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일저자로 이루어진 출판물인데 반해 <비평고원 10>은 복수의 저자로 이루어진 책이다. 자신이 주장을 개진하고, 상대방을 비판하고, 인터넷 글쓰기를 둘러싼 장단점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정기적으로 온라인 비평모임을 갖는 '화요논평' 멤버들의 글을 묶은 1부 '화요논평',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의 주요 텍스트를 비평한 3부 '문학의 고원', 한국 인문·사회과학서의 번역 오류를 지적하는 6부 '번역의 고원' 등은 여타의 학술지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수준을 자랑한다. 문학·예술·철학에서 축적한 지난 10년의 담론이 방대한 분량에 오롯이 담겼다.

인터뷰
"커뮤니티의 특징 잘 보여주는 글 뽑아"

이 커뮤니티는 밀란 쿤데라와 가라타니 고진 팬 카페처럼 운영되다가 어느 순간 비평 공간이 됐다. 회원들이 이렇게 활발하게 비평문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인문학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타 영역에 대해서 말하기 쉽지 않다. 비평가들은 대부분 청탁을 받아 글을 쓰는데, 청탁은 필자의 이전 글을 보고 비슷한 글을 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한국문학을 전공하지만, 카페 운영 초창기에 외국문학에 대해서 글을 많이 썼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반응을 보이니까 동요를 받아서 더 열심히 쓰고. '비평고원'은 자유로운 공간이고, 자기분야 이외에 관심을 표출할 수가 있다. 이런 특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이 책을 내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계기가 있었나?

"애초에 비평관련 반년간지를 만들 생각으로 2008년 시작했다. 주제를 정하고 회원들에게 기고 글을 받으려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지체됐다. 그리고 일단 잡지를 내면 지속적으로 출간해야 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지난해 회원들끼리 잡지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10주년 기념집을 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여 책을 묶었다."

2만 개 게시글 중에서 책에 넣은 글을 선정한 기준은?

"처음에는 비평의 질을 기준으로 수준 높은 글을 묶으려고 했다. 게시글을 다시 읽으면서 기준을 바꾸어서 커뮤니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을 뽑았다. 최대한 개인당 5편을 넘지 않도록 선정했는데, 가장 오래, 활발하게 활동한 '불멸회원'(최소 3달에 한 번 이상, 비평을 남기는 회원)들이 주로 선정했다."

회원은 1만 명이 넘지만, 활발하게 쓰는 사람은 200여 명 안팎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카페에 올라온 글이 너무 유려하고 길다. 가입하고 글을 쓰지 않는 '새내기 회원'들이 눈팅만 하는 것도 이런 글들에 주눅들어서가 아닐까. 운영자는 언제 다 이 글을 읽나?

"하루에 올라오는 글은 몇 편 안 된다. 많으면 4,5편이고 긴 글은 1편 정도다. 한 번에 몰아서 읽기는 불가능하지만. 매일 들어가 꾸준히 읽다 보면 회원들 글을 다 읽을 수 있다. 회원들의 글이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전문적이긴 하지만, 회원의 절반 이상이 일반 직장인들이다."

예를 든다면?

"불멸회원인 K님은 병아리 감별사이고, 폭주기관차 님은 지방에서 약사로 근무한다. 커뮤니티 회원 특징 중 하나는 해외에서 접속한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민자들도 많고, 유학생도 많다. 통역사, 직장인, 가정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비평을 남긴다. 대학에서 글쓰기 훈련을 받은 사람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더 감성적이고 좋은 글을 많이 쓴다."

오프라인 모임은 몇 번 정도 가지나?

"1년에 두 번, 카페 생일과 연말에 모이는 정도다. 온라인 공간의 특징을 살려나가는 게 좋을 듯해서 자주 모이지는 않는다."

단행본 <비평고원 10>에서 10의 의미가 창립 '10주년'이란 뜻도 있지만, 2010년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반응이 좋으면 <비평고원 11>, <비평고원 12> 등 시리즈로 낼 생각인가?

"반응이 좋으면 계간지 형태로 바뀔 수도 있고, 주요 필자의 글을 모아 비평고원 총서로 단행본을 낼 생각도 갖고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