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발이 있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그의 저서 ‘문화인류학’에서 인류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면서 진화의 원동력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약 6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직립보행의 역사가 바로 인류 진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도구 개발, 두뇌 발달, 언어 창조, 수명 연장 등의 직접적인 동인을 직립보행에서 찾는다.

직립보행, 즉 걷기가 오늘의 인류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이듯 사람의 걸음걸이는 개인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걷기의 역사’를 쓴 조지프 A. 아마토는 ‘걷기는 곧 말하기’라고 단정했다. 걷기는 자기 나름의 방언과 관용구를 지닌 언어이며 걷는 사람의 몸매와 눈빛, 얼굴 표정, 팔 다리의 움직임, 엉덩이 움직임, 옷차림 등은 그 사람의 지위와 신분, 현재 상태, 목적지 등 풍부한 정보를 노출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사막에 찍힌 발자국만 보고 발자국 주인공의 나이, 성별, 건강상태, 무기 소지 여부 등 수많은 정보를 알아낸다. 미국의 FBI나 CIA는 특정인물의 걸음걸이를 파악해 위성으로 추적하기도 한다.

골프에서 걷기는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가. 11세기 전후 스코틀랜드 대서양 연안의 황량한 들판에서 양떼를 몰던 목동들이 심심풀이 삼아 나무 막대기로 돌멩이나 털 뭉치를 토끼굴에 처넣는 게임을 즐기거나, 마을의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재미 삼아 돌멩이를 치며 걸었다는 골프 기원설은 걷기가 없는 골프는 존재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18세기 프랑스의 대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갈파했듯 낭만적인 걷기는 철학과 시의 산실이었다.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 시인들은 산책, 산보 혹은 도보여행, 탐험 등 다양한 형태의 걷기를 통해 사상을 심화시키고 시를 짓고 자연과학을 연구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정규학교에 다닐 수 없어 혼자서 숲 속을 헤매며 자연을 관찰하면서 전인적 지식을 얻고 예술혼을 키웠다.

골프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형태의 낭만적 걷기다. 골프장 자체가 다양한 자연을 모아놓은 압축 공간이며 여기서 라운드를 즐기는 사람은 낭만적 걷기의 애호가들인 셈이다. 인공이 가미되긴 했지만 초원, 연못과 개울, 모래밭, 바위와 절벽, 덤불과 수목이 어우러진 골프코스는 현대인들에겐 4~5시간 동안 다양한 자연환경을 경험하며 대화하고 사색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운동’인 골프를 한다는 것만큼 매혹적인 소일거리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서양에 ‘지팡이 짚을 힘만 있으면 골프를 하라’는 속담이 있는 것도 단조롭기 쉬운 보통 오솔길의 걷기와 차원이 다른 골프코스에서의 걷기가 안겨주는 혜택과 즐거움 때문이리라.

미국 PGA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예외 - 이를 테면 연장전을 벌일 경우, 또는 의사가 인정하는 장애가 있을 경우 - 를 제외하고는 선수가 카트를 타고 경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는 골프에서 걷기의 숭고한 철학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다. 골프는 누가 뭐래도 걷기에 골프채를 더한 것 이상일 수 없다. 고가의 장비와 화려한 의상은 장식품일 뿐이다. 골프에서 걷는 즐거움을 박탈해버린다면 골프는 금방 인기 없는 스포츠가 되고 말 것이다.

골프가 운동이냐 오락이냐. 이에 대한 대답을 보면 골프를 즐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이 확연하다. 골프의 운동효과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부정적인 편에 가깝다. 운동을 위해 골프를 택한 사람들 중에서도 별로 운동이 안 된다며 중도에 종목을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 골프를 즐기면서도 골프가 그다지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다.

“골프는 시간은 많이 걸리는데 운동은 제대로 안 된다. 슬슬 걷는 것이 오락일 뿐”이라고 여러 자리에서 말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은 골프세계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의 부족한 상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베트남의 한 골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운동도 되지 않으면서 시간은 엄청 걸린다는 이유로 골프를 기피했었다.

18홀을 한번 라운드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골프는 약간 강도 높은 걷기 수준의 운동효과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다. 미국 피츠버그대 의학연구센터 근신경연구소의 스콧 르파르트 박사는 “18홀을 돌면 45분간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것과 비슷한 운동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스콧 박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골퍼들은 평균 8.64㎞를 걷고 1954㎉의 열량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캐디의 도움을 받으면서 걸어서 라운드하면 소비 열량이 1527㎉로 줄어들고 카트를 이용해 라운드 하면 걷는 거리가 3.84㎞로 줄고 소비 열량도 1303㎉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스포츠전문 채널인 ESPN이 60개 종목의 스포츠를 대상으로 지구력 근력 스피드 유연성 같은 10개 항목을 조사해 종목별 순위를 매긴 결과 1위는 복싱, 2위는 아이스하키, 3위는 축구가 차지했고 골프는 51위에 머물렀다. 순위만으로 보면 바닥권이지만 그래도 롤러스케이팅(52위) 승마(54위) 사격(58위) 당구(59위) 낚시(60위)보다는 운동효과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운동효과만을 놓고 봐도 골프를 결코 운동이 안 되는 오락으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 김광준 박사는 "체중 70㎏의 성인이 캐디백을 메고 라운드 할 때의 분당 소비열량은 5.0~5.6 ㎉로, 야구(4.8) 반코트 농구경기(4.7)보다 많고 테니스 복식(5.4)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에너지 소비는 물론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도움이 되는 스포츠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위에 열거된 운동효과는 단지 18홀을 라운드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여기에 평소 골프를 잘 하기 위해 하는 다양한 준비운동을 보태면 골프의 운동효과는 그 어떤 스포츠에도 뒤지지 않는다.

골프애호가들에게 운동이란 결코 라운드 시의 걷기와 스윙이 전부가 아니다. 매일, 혹은 일주일에 몇 차례 골프연습장을 찾아 한두 시간씩 스윙 연습을 하는 것에서부터 신체의 각 부분의 근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 지치지 않기 위한 체력훈련 등 골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도 부단한 체력 단련이 필수다.

PGA투어나 LPGA투어의 선수들은 골프 연습 외에 하루 3~5시간의 다양한 근력운동을 하지 않고선 버텨낼 수 없다. 스타급 선수들의 견고한 플레이, 3~4일간의 강행군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은 라운드를 위한 체력단련의 결과다. 샤워장에서 만난 프로선수들의 맨몸을 보면 이들이 격투기선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근육이 골고루 발달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골프는 연습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마력이 있다. 스코어가 나빠지거나 도전하고 싶은 상대가 나타났을 때도, 스코어를 유지하거나 개선하고자 할 때 연습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여기에 연습 자체가 즐겁기까지 한 장점도 하다.

골퍼들이 골프를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평균 5년 정도 더 장수를 누린다는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연구결과는 골프의 탁월한 운동효과를 증명해준다. 최근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연구소의 연구진이 30만명의 골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골프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일정 시점에 사망할 가능성이 40%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평균 5년 더 오래 사는 것과 맞먹는다고 연구진은 말했다. 또 이 연구에서 핸디캡이 낮을수록 더 건강한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진은 골프가 육체적으로 격렬한 운동은 아니지만, 18홀 한 라운드가 보통 4마일(약 6.4㎞) 이상 걷기를 수반하는 건강에 좋은 운동이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골프의 사교적 성격도 수명을 늘리는 데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만큼 좋은 운동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골프한국 프로골프단 소속 칼럼니스트에게는 주간한국 지면과 골프한국, 한국아이닷컴, 데일리한국, 스포츠한국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방민준 골프한국 칼럼니스트 news@golf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