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핵관’ 2선 후퇴 대신 초·재선이 홍위병 나서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대통령실 안에서 인적 쇄신이 진행되고 있고 직원들의 최고도 역량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 원칙이 검찰 출신에게만 예외로 적용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내외부에서 나온다'는 물음엔 "잘 살펴보겠다"고만 말한 뒤 자리를 떴다. (사진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의 권력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 참모진을 물갈이하는 과정에서 소위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이 2선 후퇴의 길을 밟고 있다. 대표적 윤핵관인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윤석열 정부에서 어떠한 임명직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백의종군’을 표명했다. 윤 대통령과의 문자 노출 사건 이후 지도력의 위기 상황을 맞은 권성동 원내대표는 사퇴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새로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구축해 당내 혼란을 수습한 후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상태다. 새 비대위 구성과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국민의힘 초·재선 의원들의 등장이다. 국민의힘 의원의 4분의 3에 달하는 이들 초·재선 의원들은 중진의원들의 반대 주장을 제압하면서 비대위 구성을 관철했다. 이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한 정황이 밝혀져 초·재선 의원들이 향후 당 권력을 둘러싼 윤 대통령의 ‘홍위병’으로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침묵 깨고 목소리 높이는 초·재선
당내 중진 배제한 채 비대위 추인

최근 국민의힘의 위기 수습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세력은 초·재선 의원들이다. 당 중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비대위 구성을 박수로 추인하는 상황을 주도했다.

초·재선 의원들은 중진 의원들을 향해 맹비난 공세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동안 정치 관행과 달리 정치 선배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듯한 거침없는 발언으로 날을 세운 장면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따라서 초·재선 의원들의 태세 전환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지난달 30일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는 법원 판단을 수용해 새 비대위 출범 대신 원내대표를 다시 선출해 대표 직무대행 체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중진 의원인 서병수·윤상현·조경태 의원과 당권주자인 안철수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윤 의원은 회의 도중 퇴장하며?기자들과 만나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여 다시 원내대표가 당 대표 직무대행으로서 최고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원내대표가 리더십을 잃고 동력도 명분도 없어 새로운 원내대표가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병수 의원님도 그렇고 안철수 의원님도 그렇고 조경태 의원님도 그렇고 중진 의원들이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조 의원도 회의 도중 기자들과 만나 "어쨌든 책임 정치를 해야 한다"며 "원인 제공자인 권 원내대표는 즉각 물러나는 게 국민과 당원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초·재선 의원들은 이들 중진의 의견을 뭉개버렸다. 당내?초선 모임?간사직을?맡고?있는?노용호?의원은 의원총회 후 기자들과 만나 "의총장에서?한?마음?한?뜻으로?결의된?사항에?대해서는?함께?마음을?모아서?추진해야지,?개별 의견을?나와서?이야기하면?뜻이나?의도가?와전되고?곡해돼서?당에?더?큰?분란을?일으킬?수?있다"며?"그런?의원에?대해서는?초선?의원?일동이?상당히?심각한?유감을?표한다"고?말했다.?

이날 성명 발표에는 대선 당시 윤 대통령 선거대책본부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던 의원 다수가 포함됐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활동한 박수영·유상범 의원, 대선 후보 시절 수행팀장을 맡은 이용 의원 등이다.

국민의힘 재선 모임도?의원총회를 마친 후?발표한?성명서에서?"의총에서?숙고?끝에?추석?전까지?새?비대위를?출범시키기로?결정했음에도?일부?중진 의원들을?중심으로?대안도?없이?당을?흔드는?언행을?계속하는?것은?매우?부적절하다는?점을?지적하며?자제해줄?것을?강력하게?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당이 지금의 비상상황에 이르게 된 출발점은 이준석 전 대표의 성 상납 의혹"이라며 "재선의원 모임 일동은 당내 상황을 조기에 수습하고 국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당이 조속히 새 비대위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데 함께 뜻을 모았다"고?했다. 

권성동?원내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에 대한?지지?입장을?분명히?한 것이다.?재선 모임에는 윤핵관으로 꼽히는?윤한홍·이철규?의원 등이 속해 있다.?

권 원내대표는 이날 모두발언에서 "현재 당의 위기가 무엇에서 시작되었나. 이준석 전 대표가 '성 상납' 의혹 무마 시도로 윤리위 징계를 받으면서 촉발됐음이 주지의 사실"이라며 자신을 향한 사퇴론에 항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초·재선 의원들이 대립각을 세우자 다른 당내 중진 의원들도 고개를 내젓고 있다. 조해진 의원은 지난달 31일 YTN '이재윤의 뉴스 정면승부'에 나와 “옛날에는 다선 중진들이 초·재선들 입단속을 했지 않나?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초·재선들이 다선 중진들 입단속을 하는 거 보고 아이고, 우리 당의 다선 중진들 권위가 땅에 떨어졌구나. 우리 당도 많이 변했구나”라고 했다.

공천 미끼로 초·재선을 홍위병으로?
‘윤핵관’ 빈자리 채울 친위 세력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가 정회되자 밖으로 나오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의원총회가 당 지도부 의중대로 결론이 나는 과정에서 의미심장한 정황들이 드러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일부 의원들이 의원총회 직전 윤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사실상 인정하는 보도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윤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권 원내대표와 만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상황이어서 윤 대통령이 직접 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새 비대위 체제 전환을 원하는 윤 대통령의 의중이 전달돼 초·재선 의원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지난 1일 관련 보도와 관련해 "대통령은 당 의원에게 도와달라, 그렇게 부탁한 적이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오전 용산 청사 브리핑에서 "대통령이 당에 SOS를 쳤다는 언급이 보도됐는데 사실에 맞지 않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대통령실은 부인했지만,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여기는 분위기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이날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대통령은 관여 안 한다는 말 믿는 국민이 있겠나? 그것도 여러 가지 나오는 걸로 봐서. 오히려 전부 윤심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당권주자인 김기현 의원은 이날 불교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당연히 소통하고 의견이 있으면 조율도 한다"며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같은 집안의 부부관계"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의원들과 통화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초·재선 의원들의 움직임에 윤 대통령이 더 깊숙이 관여했다는 정황도 새롭게 나왔다. 지난 1일 채널A는 윤 대통령이 "초선 의원들이 더 세게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여권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면서 "초선 의원이라고 당 대표, 원내대표를 못 한다는 당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도 했다고 전했다.

초선 의원이 당 대표나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다면 밀어줄 수도 있다는 의중이 담겼다는 해석이 충분하다. 

현재 국민의힘 의원 115명 가운데 초선은 63명이다. 재선까지 합하면 84명으로 전체 중 73%에 달한다. 초·재선을 하나의 세력으로 묶을 수 있다면 확고한 당내 주류 세력으로 자리매김이 가능한 숫자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매력적인 호위 세력으로 여길 만하다. 어차피 차기 당 대표 선거에서 핵심 윤핵관을 앞세우기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국민의 부정적인 시각이 부담될 뿐 아니라 최근 지지율 악화의 책임 공방에서도 윤핵관이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결국 윤핵관과 거리두기가 불가피해진 것이고 장제원 의원의 백의종군 선언도 그 연장선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일선에서 한 발 후퇴한 윤핵관이지만 윤 대통령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이들을 내치기보다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손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윤핵관의 빈자리를 초·재선 의원들로 채워가겠다는 구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래서 직접 통화를 통해 스킨십을 강화하고 당 대표나 원내대표도 가능하다고 부추기는 장면이 나올 법하다.

초·재선 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음 총선에서의 공천이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의 지원이 든든하다면 공천에 유리한 시나리오 모색도 가능하다.

우선 권 원내대표가 사퇴하면 초·재선 의원들이 결집해 원하는 원내대표를 선출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주호영 직전 비대위원장이 유력해 보인다. 윤 대통령과 현 지도부가 이미 밀어준 카드다.

다음으로 전당대회 시기가 결정되면 두 가지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 있다. 하나는 윤 대통령의 의중과 초·재선 의원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당 대표로 선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윤 대통령의 말대로 초·재선 의원들이 직접 당 대표 경합에 나서는 방식이다. 

두 카드 모두 다음 공천에서 초·재선 의원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특히 중진 의원들이 버티고 있는 텃밭 장악도 가능하다. 중진 의원을 압박하거나 내칠 힘을 얻기 때문이다. 

이는 친위 세력으로 결집해 윤 대통령 중심의 당 구조로 전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다. 윤 대통령, 윤핵관, 초·재선 의원들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구도다. 

문고리 권력 ‘권핵관’ 무풍지대
윤핵관 대체자로 김한길 떠오르나

대통령실 개편을 계기로 윤 대통령은 친정체제 구축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실의 재편으로 권력 구도가‘검핵관’(검찰 출신 핵심 관계자)만 남고 사실상 물갈이가 되는 셈”이라며 “윤 대통령은 수석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참모진으로 친정체제를 갖춰 윤핵관의 그늘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집권 초 여의도에 분산됐던 권력의 구심점이 용산으로 집중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최근 대통령실 내부 감찰을 통해 물러난 참모진들은 대부분 장제원 의원 등 윤핵관 핵심들이 꽂아 넣은 정치권 출신 정무직 공무원인‘어공’(어쩌다 공무원)들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김대기 비서실장을 비롯해 대통령실 수석들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효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윤핵관이 배치한 참모진이 아닌 비서실장과 수석들이 직접 참모진을 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 의원은 이날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에이스들로 짜인 것이 아니라 외부 인사의 입김에 의해 백설기에 팥이 꽂혀 있듯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을 지금 들여다보는 것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조 의원은 이어 "내부정보가 외부로 유출되고 혹은 자기를 거기다 꽂아놓은 쪽에다가 동시에 보고한다는 등의 우려가 있었다"며 "윤핵관 라인으로 대통령실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일단 지금 나가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일선에서 물러난 윤핵관의 빈자리를 어느 인물이 채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주목을 받는 이가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다. 윤핵관과 함께 윤 대통령의 정계 진출을 뒤에서 지원하고 이끈 인물인 탓이다.

이와 관련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 1일 KBS ‘여의도 사사건건’에서 윤핵관 대신 윤 대통령이 선택할 정치인과 관련해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행보를 좀 눈여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민주당은 최근 대통령실의 개편과 관련해 윤 대통령을 향해 공세의 날을 세웠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정책조정회의에서 "칼바람은 실무진에게 불어닥치고 검핵관은 무풍지대인데 인적 교체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모든 책임의 종착역은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비난했다.

박 원내대표는 또 "실력만 보고 뽑는다던 윤석열 정부가 인사를 어떻게 했길래 취임 4개월도 안 돼 대폭 교체하느냐"라며 "윤핵관이 추천한 어공들만 쫓겨나는 이유가 따로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재형 기자 silentroc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