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정의연대 등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홍콩 ELS 대규모 손실사태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금융정의연대 등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홍콩 ELS 대규모 손실사태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통해 산업에 자금을 몰아주는 체제에서 자유롭게 수익을 추구하는 시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엄격한 규제에서 벗어난 금융자산 가격은 예측하기 어렵게 변동하고, 이에 따라 위험을 줄이려는 헤징(Hedging)이나 오히려 더 높은 수익을 얻으려는 투기가 활개를 쳤다.

1999년 4월 외환거래의 실수요 원칙이 폐기되고 외환 파생상품 거래가 대폭 자유화됐다. 동시에 한국선물거래소가 개설되면서 CD금리선물, 달러선물·옵션, 금선물이 도입된데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국채선물, 2001년 1월에는 코스닥50선물이 도입됐다.

2007년 ‘자본시장법’이 제정돼 금융상품 허가도 열거주의에서 포괄주의로 바뀌었다. 금지된 것을 제외하고 모두 허용해 파생상품 출시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사모펀드가 활성화됐고 위험하지만 고수익을 노릴 수 있는 금융상품들이 서서히 시장에 퍼져 나갔다.

금융 겸업주의를 받아들여 2000년 11월에는 금융지주회사 설립이 허용됐다. 이에 신한·KB·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지주사가 형성됐다. 이들은 산하에 은행뿐 아니라 카드, 증권, 보험, 캐피탈, 저축은행, 자산운용 등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은행에 보험 등 타금융 상품의 판매가 허용됐고 여기에는 파생금융상품도 포함됐다.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고수익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파생상품이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2008년 키코 사태였다. 다수의 수출 중소기업들은 환율 변동으로 인한 위험을 막고 짭짤한 이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외환 파생상품을 은행으로부터 구매했다.

그러나 이 상품은 특정 환율 구간을 벗어나면 큰 손실을 볼 수 있게 설계돼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723개 기업이 약 3조 3000억원의 피해를 입었고 상당수 기업이 파산했다. 피해 기업들은 은행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3년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은행이 충분히 설명했다면 피해 책임은 가입자가 져야 한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러나 사태 발생 11년만인 2019년 금융감독원은 은행들의 불완전 판매를 인정하고 손해액의 15~41%를 배상하도록 권고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19년 일부 은행에서 판매한 파생결합펀드(DLF)가 다시 대규모 손실을 불러왔다. DLF는 파생결합증권(DLS)을 편입해 운용하는 펀드다. 말썽이 난 DLS는 독일 국채금리와 연동되는 증권으로, 금리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손실이 생기는 구조로 돼 있었다. 그해 11월 8일 기준으로 평균 손실률이 52.7%에 달했고 원금을 까먹는 경우도 있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이 위험한 상품이 은행에서, 더구나 사모방식으로 판매됐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은행을 원금보장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여긴다. 공모펀드의 경우에는 적합성·적정성 원칙 등 엄격한 규제가 적용된다.

적합성 원칙은 고객에게 부적합한 상품을 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적정성 원칙은 투자 권유가 없더라도 고객이 부적합한 상품에 투자하는 경우 그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모펀드에 대해서는 그러한 규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당연히 불완전 판매가 만연했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태를 경험한 국회는 2021년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제정했다. 자본시장통합법에서 일부 금융상품에만 적용되던 6대 판매규제를 모든 금융상품에 확대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적합성 원칙·적정성 원칙·설명 의무·불공정행위 금지·부당권유 금지·허위과장광고 금지가 그것이다.

규제를 위반하면 관련 수입의 50%까지 과징금을 맞을 수 있다. 설명 의무에 충실했음을 판매자가 입증해야 한다. 소비자의 청약철회권이 모든 상품에 인정된다. 규제를 위반하는 경우 소비자는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이참에 은행의 고위험 파생상품 판매를 금지하자는 여론이 일었으나 은행의 반발에 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대신 2019년 11월 기준으로 파생상품 판매총액을 규제했다. 이는 징벌적 성격이 있다. DLF를 많이 판 은행은 추가 판매할 여지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게 판매한 은행에게 더 팔 유인을 제공함으로써 독으로 작용했다.

강력한 보호장치 추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또 다시 은행 판매 파생상품이 말썽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이 주인공이다. 내용은 비슷하다. 대개는 안전하게 보이지만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엄청난 손실이 발생한다. 연말까지 최대 6조원으로 손실액이 불어날 수 있다고 한다.

금융감독원은 해당 은행들에게 배상을 압박하면서 자율배상 기준안을 제시했다. 불완전 판매가 명분으로 대부분 투자자는 20~60% 수준에서 배상 받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DLF 사태 배상비율 40~80%보다 낮다. 공모펀드로 판매돼 관련 규제가 상당 부분 지켜졌고 ELS가 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진 상품이라는 것이 근거다.

그러나 형식적인 규제는 준수됐는지 모르지만 이 복잡한 금융상품의 구조와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한 투자자가 얼마나 있었을지 알 수 없다. 재투자 비율이 높다고 하지만 과거 안전한 실적을 거뒀다는 경험에 근거한 것일 뿐 투자자에게 충분한 지식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은행은 판매실적을 고과에 반영하며 직원은 압박 아래서 판매에 골몰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더 강한 규제를 가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사태의 반복을 피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성장 압력을 받고 이자이익의 벽에 부딪힌 은행은 비이자이익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경영진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들을 닦달해 실적을 올리려고 할 것이다. 벽에 금이 갔다고 땜질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원인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은행이 손쉬운 이자 장사에 안주해 거대한 이익을 거뒀다고 비판하며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은 예대마진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이며 안정성이 생명이다. 사회의 잉여자금을 모아 필요한 기업과 개인에게 대출하고 심장처럼 경제에 돈을 순환시키는 것이 기본 임무다.

은행이 안전한 이자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다만 정부는 그것이 과도하지 않도록 통제할 의무가 있다. 과거 몇 년간 은행 이자이익이 부푼 것은 부동산 거품에 원인이 있고,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정부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금리가 동결되면서 은행이 비이자이익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는 이러한 요구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한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은행이 고위험 파생상품 판매에 열을 올리면서 다수의 피해자가 양산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투자자의 다수는 은행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를 결정했을 것이다. 반복되는 피해는 은행은 물론 정부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파생상품의 폐해는 이미 충분히 입증됐으므로 더 이상 미봉책으로 타협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은행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며 고위험 파생금융상품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정인호 객원기자 프로필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 경제학 박사 ▲KT경제경영연구소 IT 정책연구 담당(상무보) ▲KT그룹 컨설팅지원실 이사 ▲건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낸 경제 및 IT 정책 전문가


정인호 객원기자 yourinh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