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앞두고 서울 영등포갑의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찾은 영등포시장역 인근 청과시장. 사진=안병용 기자
총선을 앞두고 서울 영등포갑의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찾은 영등포시장역 인근 청과시장. 사진=안병용 기자

[주간한국 안병용 기자] 통상 선거는 정책과 공약으로 후보자의 우열을 가려 당선자를 가린다. 유권자 중심으로 본다면 크게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정치 성향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이는 영남이나 호남 등 여전히 지역주의 정치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후보자를 선택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가 공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덕성이나 청렴성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선택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서울 영등포갑에선 유권자가 고려할 만한 모든 투표 결정 요인이 지난 4일 이후 뒤로 밀렸다. 정계에 입문한 지 무려 25년 만에, 그것도 총선을 고작 40일 앞에 두고 정반대의 정치 성향을 지닌 정당으로 둥지를 옮긴 김영주 의원의 ‘배신의 정치’ 프레임이 앞뒤 순서를 바꿨다.

영등포시장역 인근의 한 건물에 내걸린 김영주 국민의힘 후보의 현수막. 사진=안병용 기자
영등포시장역 인근의 한 건물에 내걸린 김영주 국민의힘 후보의 현수막. 사진=안병용 기자

지난 20일 영등포시장역 인근에서 김영주 의원의 선거 현수막을 카메라에 담던 기자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온 60대 박모 씨는 투표를 누구에게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토로했다. 30년 민주당 골수 지지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현수막에 적힌 빨간색의 ‘국민의힘’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도 하다. 파란색을 당색으로 삼고 있는 민주당에서 4선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 의원은 오랜 세월 파란 점퍼와 의리를 지켜왔다. 그야말로 ‘한솥밥 식구’인 줄 알았던 김 의원이 빨간 점퍼를 입고 선거 운동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법하다.

당산1~2동, 양평1~2동, 영등포동, 영등포본동, 도림동, 문래동, 신길3동 등으로 이뤄진 영등포갑은 진보 진영의 강세 지역이다. 2000년대 들어 치러진 6번의 총선에서 진보 정당이 4번이나 기쁨을 만끽했을 정도다. 그 중 3번의 승리가 김 의원의 손에서 일궈졌다. 김 의원은 21대 총선에서 문병호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를 상대로 모든 동(洞)에서 득표율이 앞서며 18%포인트 차이로 무난하게 승리한 저력 있는 정치인이다.

당시 보수의 완패는 김 의원의 ‘인물’이 통해서였을까, 아니면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진보 세력의 ‘결집’ 덕분이었을까. 22대 총선에서 그 궁금증이 해결될지도 모른다. 김 의원이 보수 정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당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이는 영등포에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영등포시장 교차로에 위치한 한 건물에 걸려 있는 채현일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현수막. 사진=안병용 기자
영등포시장 교차로에 위치한 한 건물에 걸려 있는 채현일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현수막. 사진=안병용 기자

민주당은 김 의원 대신 영등포구청장 출신인 채현일 후보를 공천했다. 채 후보는 국회의원 보좌관과 서울특별시장 보좌관, 청와대 행정관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정치‧행정 경험을 쌓았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 25개 지자체장 중 최연소로 영등포구청장에 당선되며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대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20년째 영등포구에 살고 있다는 허영석 씨는 채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김 의원의 탈당은 상식밖의 정치”라면서 “그저 배지만 바라본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며 혀를 찼다.

반면 하위 평가에 반발해 민주당을 탈당한 행보는 잘한 선택이라며 옹호하는 이도 있었다. 영등포시장역 인근에 위치한 청과시장에서 15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40대 남성은 “영등포를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면서 “당을 옮긴 일은 요즘처럼 변화가 심한 시대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 의원은 진보 유권자들의 ‘이탈표’를 노린다. 그는 선유고가 철거 등 영등포에서 이뤄낸 자신의 업적을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하며 지역 내 바닥 민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4선 중진으로서의 개인 역량을 앞세운 ‘인물론’으로 승부하는 전략이다. 채 후보가 유세 현장에서 당적을 바꾼 김 의원이 그간 해온 일을 거론하는 대신 ‘배신자’ 이미지를 키우는 것은 그가 민주당에서 당한 컷오프(공천배제)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다. 결국 ‘배신’ 프레임이 영등포갑 선거의 최대 변수로 떠오른 양상이다.

영등포역 앞에서 만난 70대 여성은 지난 선거에서 김 의원에게 투표했다고 설명한 뒤 “탈당하더라도 왜 하필 국민의힘으로 가느냐. 그러니 철새 소리를 듣는 것”이라면서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왔으면 찍어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등포시장 내 동남종합상가에서 20년 넘게 옷을 판매하고 있는 60대 여성은 “선당후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을 아꼈다. 당을 먼저 생각했으면 차후에 다른 기회가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다만 김 의원이 12년간 지역구 관리를 해온 만큼 지역 현안에 있어서는 해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우리나라 노동계의 대모로 불리는 인지도와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 52시간제 등을 주도한 이력을 통해 중도 확장 가능성도 예상된다. 이번 총선에서는 ‘영등포역 경부선 지하화 우선 추진’을 대표 공약으로 내걸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만난 50대 여성은 “합리적인 인물이니 국회부의장까지 하지 않았겠나”라며 “탈당한 이유도 이해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그의 남편은 “20년 넘게 머문 당에서도 탈당하는데 총선 이후에 국민의힘을 또 탈당 안 한다는 보장이 있느냐”며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평가절하했다.

채 후보는 4년 동안 구청장을 역임한 이력을 앞세운 ‘일꾼론’으로 주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한다. 구청장 시절 이룬 대표적인 성과는 영등포역 일대의 노점 철거다. 그는 불법 노점상들이 50여년 간 난립해 있던 영중로 일대를 정비해 달라는 민원을 받은 지 불과 8개월 만에 처리하는 행정력을 선보였다.

인도를 점거했던 노점상들이 사라지자 시야가 트이면서 자연스레 구민들의 보행권이 확보됐고, 도로를 이용하는 주민들로부터 호평이 쏟아졌다. 채 후보는 4월 총선에서의 공약도 ‘회색빛 공장도시에서 다채로운 문화도시로’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등 재건축에 방점을 찍었다.

영등포역 인근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기사 김모(64) 씨는 “여기를 수도 없이 지나다녔지만 노점상 철거는 정말 속 시원한 변화였다”면서 “행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며 채 후보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영등포역 인근에서 분식을 파는 60대 여성은 “불법 신고에 대해 신경 안쓰고 장사하게 됐다”면서 “물과 전기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다”며 호감을 표했다.

다만 같은 일에 대해 비호감을 갖는 이들도 있었다. 한 노점상은 채 후보에 대해 “우리를 무자비하게 내쫓은 사람”이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허은아 개혁신당 영등포갑 후보.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허은아 개혁신당 영등포갑 후보.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영등포갑에 보수는 없다?…허은아의 간절한 목소리 “내가 진짜 보수”

전·현직 진보 정당 출신 정치인 간의 격돌이 펼쳐지면서 다른 선거구와 달리 선거전이 색다르게 돌아가는 분위기지만 선거 흥행을 한층 더 끌어올릴 또 다른 보수 정당 후보가 없지는 않다. 허은아 개혁신당 후보는 ‘진짜 보수’를 천명하며 얼굴을 내밀었다. 거대 양당 후보가 모두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후보들인 만큼, 대체제를 원하는 이들은 허 후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허 후보는 대한항공 승무원 출신으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시절 영입인재로 국회에 입성했다. 지난 1월 국민의힘을 탈당하며 비례대표 의원직을 내려놨다. 어릴 적 부모님이 영등포 청과시장에서 과일 가게를 했다는 허 후보는 개혁신당으로부터 전략공천을 받았다. 당선되면 가장 먼저 추진할 과제로는 누구나 양질의 온라인 강의와 멘토링을 들을 수 있도록 할 ‘영등포런’(Learn)을 제시했다.

청과시장에서 짐을 나른 뒤 잠시 담배를 피다가 기자를 만난 40대 남성은 “전국적으로 제3지대에 있는 후보들에게 관심이 있다”면서 “허 후보의 공약도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영등포시장에서 순댓국을 판매하는 60대 여성은 “다시 국민의힘으로 가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도 보수 후보가 잘되면 좋겠다”며 민주당 출신들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손을 휘저었다.

전‧현직 의원들이 금배지를 놓고 대결을 벌이는 가운데 여론조사 상으로는 채 후보가 우위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론조사꽃이 지난 18~19일 만 18세 이상 남녀 507명을 대상으로 자체 조사한 결과에서 채 후보는 44.8%, 김 의원이 27.4%, 허 후보가 2.1%로 나왔다(무선 전화면접, 응답률 14.9%,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진보 텃밭 내에서 김 의원과 채 후보 간의 표 분산이 불가피한 가운데 민주당 지지층의 표심이 어디로 갈지에도 관심이 모인다. ‘비명횡사’로 압축되는 민주당 공천 파동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김 의원이 반대급부로 채 후보를 ‘친명횡재’ 수혜자로 공략할 수 있는 구도가 짜여졌기 때문이다. 다만 채 후보는 김 의원이 컷오프된 결정적인 사유인 ‘채용비리’ 의혹을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어 양측의 대결이 네거티브전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적다.

보수 진영의 표심이 갈릴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 출신인 김 의원에 대해 반감을 갖는 보수 지지층이 상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여론조사에서 김 의원이 채 후보에게 다소 뒤지는 것도 ‘민주당 출신 김영주’에 대한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분산된 보수표는 허 후보에게 갈 가능성이 크다.

양평동에서 만난 30대 이진혁 씨는 “국회의원을 4번이나 했는데 한번 더 하겠다고 당을 옮기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면서 “이번 총선은 김영주를 심판하는 선거”라고 언성을 높였다. 옆에 있던 친구 박준민 씨는 “사천(私薦) 정당은 떠나는 게 답”이라며 “이재명이 싫어서라도 김영주를 찍겠다”고 반박했다.


안병용 기자 byahn@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