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막지하게 금리 올리거나 가격 찍어 내리는 필사의 물가 전쟁 
3~4년 내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겨도, 져도 상처는 매우 깊다

[주간한국 김병수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면담할 예정이라고 백악관이 지난 14일(현지시간) 발표했다. 걸프협력이사회(사우디·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오만·바레인)+3(이집트·이라크·요르단) 정상회의 참석 일정에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와 별도 면담을 끼워 넣었다. 면담 목표는 관계 '재설정(reset)'이다. 2018년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암살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한 미국은 그동안 사우디와 거리를 둬왔다.

미국이 인권 문제에서 물러선 건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 행진을 막기 위해서다. 바이든 대통령이 그만큼 급해졌다고 관측한다. 사우디에 석유 증산을 간청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면담 후 발표 내용을 봐야겠지만, 사우디가 석유 증산을 하더라도 유가가 잡힐 것으로 기대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유럽연합(EU)의 러시아산 원유·천연가스 수입 중단 조치가 올해 말 시행 예정이어서 근본적으로 유가 하락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산 소비재에 부과하는 고율 관세를 일부 해제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3일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철강·알루미늄 등 미국 노동자와 관계가 있는 품목은 제외하고, 가정용품 등 소비재를 중심으로 관세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모두 어떻게든 물가를 낮추려는 시도들이다.

◇ 소리 없는 세금 '물가' 

물가가 오르면 급여 생활자의 실질소득이 줄어든다. 실질소득이 준 만큼 급여 생활자의 지갑은 얇아진다. 월급 받을 때 떼지 않고 물건을 살 때 물가 상승률만큼 부담이 생겨 사실상 '숨겨진 세금(inflation tax)이다. 물가가 곧 민심이라는데, 이 물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례는 손에 꼽는다. 사실 물가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이겨도, 져도 그 상처는 골이 깊어서다.

얼마나 빠른 시간에 물가 오름세를 진정시켰느냐에 따라 그나마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 대표 사례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강력한 긴축을 이끌었던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긴축 정책이다.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가 미국 경제를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으로 빠뜨렸다. 1973년 4월부터 1982년 10월까지 미국의 월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대부분 5%를 넘겼다. 1980년 3월엔 14.8%까지 치솟았다.

1979년 8월 연준 의장에 취임한 볼커는 강력한 긴축정책을 폈다. 그는 취임 후 처음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10월 6일)에서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p)나 올렸다. 은행의 대출금리는 연 18%까지 수직 상승했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하면서 기업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볼커는 멈추지 않았다. 1981년 기준금리를 21.5%까지 올렸다. 경기 침체를 감수하고서라도 물가를 잡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당시 파산자들의 살해 위협으로 권총을 차고 근무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연구자들에 따라선 오일 쇼크에 따른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볼커의 긴축으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 더 악화했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3년간 밀어붙인 긴축 끝에 서서히 효과는 나타났다. 돈이 금리를 따라 은행으로 돌아오면서 시중 유동성이 줄고 물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하면서 석유 증산이 이뤄져 2차 오일쇼크가 해소된 것도 도움이 됐다. 1980년 3월 14.8%까지 올라갔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982년 4%까지 내려왔다. 그렇게 볼커는 1987년까지 8년 동안 연준 의장을 했다.

그렇게 다져진 땅에 취임한 후임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미국 경제의 호황을 누렸다고 평가한다. 볼커의 인플레 파이터 성향은 2018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는 "오늘 1달러로 살 수 있는 만큼을 내일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통화정책의 근본 의무"라고 썼다.

◇ 감시와 꼼수로 점철된 'MB 물가'

우리나라는 물가가 국민의 삶을 편하게 지켜줬던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물가를 겪어왔다. 1960~1970년대는 1973년 3.2%를 제외하면 거의 매년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반복된 오일쇼크가 주원인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물가조절 임시조치법'까지 만들어 임금과 가격을 통제했지만, 정부 주도의 경제 재건 정책 지출이 워낙 커 고물가를 잡을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분석한다.

전두환 정부의 연평균 물가 상승률은 3.8%로 선방했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여서 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전의 임금 억제와 가격 통제는 여전했다. 그러나 서서히 통화정책이라는 개념도 받아들였던 때이기도 하다. 1982년과 1983년엔 전년 재정지출에 대한 고려 없이 아예 백지부터 예산을 짜는 '영점기준예산'을 도입했다. 1984년엔 예산을 동결해 시중 통화량 증가를 억제했다. 역설적으로 권위주의 독재 정부여서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노골적인 가격 감시와 통제를 통한 물가 관리가 다시 등장한 건 '747(연평균 7% 성장, 소득 4만달러 달성, 선진 7개국 진입) 공약'을 내건 이명박 정부였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양적 완화로 인플레이션 압박이 전 세계를 덮친 시기다. 이명박 정부는 서민 생활 물가 관리를 위해 서민 생활과 밀접한 배추, 무, 마늘 등 52개 품목으로 이른바 'MB 물가'를 만들었다. 서민 생활에 영향을 많이 주는 품목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먹고사는 게 나아지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소비성향 고급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가격 감시 수단으로 전락했다.

1970년대 초반 정부가 '가격협정요금'이라는 제도를 통해 짜장면값을 100원으로 묶자, 유니짜장·삼선짜장 등 신메뉴가 쏟아졌던 웃지 못할 상황이 40년 넘게 지난 2010년대에 부활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물가 관리시스템을 40년 전으로 후퇴시키면서까지 신경을 썼지만, 2011년 물가상승률은 상반기에 정부 저지선인 4%를 넘은 데 이어 3분기엔 4.8%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그해 물가가 4.0%로 마감했다.

한국은행의 연간 물가상승률 목표 한계치와 오차 없이 딱 맞아떨어진 4.0%라는 숫자는 통계청이 그해 11월 소비자물가지수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물가에 상당한 압력을 가하던 '금반지'를 뺐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국제 권고 기준에 따른 조정'이라고 설명했으나, 1993년에 받은 권고를 18년이나 지난 2011년에 이행한 이유는 설명하지 못해 뒷말을 낳았다. 그렇게 이날의 사건은 '금반지의 기적'으로 불린다. 지금은 물가 지표의 적확성 향상을 위해 10년마다 물가지수 편입 항목을 조정하고 있다.


김병수 기자 bskim@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