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7일(현지시간) 휴스턴의 조지 R. 브라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전미총기협회(NRA) 연례총회의 리더십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7일(현지시간) 휴스턴의 조지 R. 브라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전미총기협회(NRA) 연례총회의 리더십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연방 대법원 보수화 ‘몽니’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미국 사회의 이념 갈등 확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장기적인 후폭풍이 예상되는 데다 인플레이션 급등으로 위기에 처한 미국 정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지난달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49년 만에 뒤집었다. 9명의 대법관 중 6명이 찬성, 3명이 반대했다. 보수 6명, 진보 3명으로 구성된 현 대법관 이념 구도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사전 유출됐던 낙태 권리 폐기 결정문 초안은 그대로 현실이 됐다.

이뿐이 아니다. 불과 일주일 후 연방 대법원은 친환경 정책에도 매질을 했다. 연방환경보호청(EPA)이 발전소 온실가스 배출 규제권을 가질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제 의회에서 권한을 구체적으로 위임받지 않는 한 EPA가 환경 규제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환경규제 강화의 길이 막혀버렸다.

연방 대법원은 거침이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총기 휴대를 규제한 뉴욕주의 규제가 위헌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낙태, 총기, 환경과 관련한 규제는 보수진영이 수십년간 불만을 가져온 사안들이다. 이런 사안들이 불과 열흘 사이에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이를 두고 보수진영은 환영했지만 진보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

이는 2019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사실상 미국 정치 사회의 기준을 확립하는 기능을 한다.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조직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들은 자신의 진영 인사를 대법관에 임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과정에서 보수 5, 진보 4의 구도가 장기간 이어져 왔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 3명의 대법관 결원이 발생했다. 특히 루스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의 사망은 치명적이었다. 미국 국민의 존경을 받은 긴즈버그는 사임을 하지 않고 직을 유지한 채로 사망했다. 

민주당 정권에서 사임했다면 민주당이 선호하는 진보 인사가 후임으로 지명됐겠지만 보수 정권하에서 진보 측 대법관의 공석이 발생했다. 

대법원 보수화를 주장했던 트럼프는 적극적으로 보수 인사를 후임에 임명했다. 통상 대선을 앞두고 대법관 공석이 발행하면 다음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해야 하지만 트럼프는 선거를 앞두고 역시 보수 성향의 코이 에이미 배럿을 대법관으로 지명했고 결국 자리에 앉혔다.

연방 대법원 보수화에 대해 우려도 있었지만 지난해만 해도 이 정도의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연방 대법원은 지난해 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전국민건강보험법(Affordable Care Act) 위헌 소송을 기각했다. 보수 진영은 실망했지만 진보는 안도했다. 착각이었다. 의료보험을 제외한 낙태, 총기규제, 환경에서 연이어 대법원은 철저히 보수진영의 논리를 따랐다.

보수의 시선은 이미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다. 동성결혼이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동성결혼에도 낙태와 같은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경고했다. 2015년 대법원이 동성결혼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라고 판결한 것을 뒤집겠다는 분명한 의지이다. 그의 주도로 보수진영 6명의 대법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1960년대 민권운동을 시작으로 미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해온 진보 진영의 위기감은 심각하다. 달라진 사회환경을 무시하고 과거로 회귀하겠다는 보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조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에 있느냐는 비판까지 확산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사면초가 상황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치솟으면서 지지율은 연일 우하향하고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는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에 넘겨줄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인프라 투자 법안들이 지금도 의회에서 낮잠 자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우위를 지켰던 하원까지 공화당에 내줄 경우 집권 하반기 2년은 식물상태로 전락할 수 있다. 

민주당에서도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CNN은 한 민주당 소속 의원이 현재의 백악관에 대해 "방향도, 목적도, 희망도 없다"고 일갈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바이든 정부는 낙태권리 폐지 결정 초안이 판결 6주 전에 유출됐음에도 우왕좌왕하는데 그쳤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은 "국민들도 이번 사안이 대통령의 손안에 있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고 비판할 정도다.

대법원의 압박과는 별개로 분유 부족 사태, 유가 급등도 바이든 정부의 능력에 의문을 갖게 하는 사안들이다. 유아용 분유 부족도 해결하지 못한 데다 연방 비축유 방출, 연방 유류세 면제, 국방물자생산법 발동 등의 대책에도 기름값은 꺾이지 않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정책 결정이 지지부진한 것도 비난을 사는 이유다. 학자금 대출 면제,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완화 등에 대한 결정이 지연되면서 바이든 정부의 무사안일을 비판하는 민주당내 목소리도 커지는 중이라고 CNN은 전했다.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도 대법원이 반대하면 언제든 무산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민주당내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의 ‘몽니’에 맞서 연방 대법원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은 바이든 대통령이 대법관 정원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바이든은 이를 일축했다. 수비를 해보지도 않은 채 연전 연패를 당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과정이 2024년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상 속에 선수교체 여론까지 불거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지지자들의 집결을 희망하는 모습과 상반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민주당 내에서 바이든 외에 인사를 차기 대선 주자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J.B.프리츠커 일리노이주 주지사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고 WP는 소개했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차기 대선에 나설 것이라고 밝힌 사실을 상기했지만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