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국가 통화들이 달러 대비 절하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대부분의 국가 통화들이 달러 대비 절하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미국 달러의 기세가 무섭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추락한 미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투입된 막대한 자금이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이를 막기 위해 뒤늦은 금리 상승이 본격화하자 벌어진 일이다. 

이제 달러는 한때 자신을 위협했던 유로, 엔, 위안화를 저 멀리 떨어뜨렸다.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 재편에 대한 대비에 서둘러야 하는 시점이다.

1980년대 일본 경제의 급상승 속에 어려움을 겪던 미국은 특단의 조치에 나섰다. 1985년 뉴욕시 맨해튼의 플라자호텔에 주요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였다. 여기서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올리기로 한 플라자 합의가 이뤄졌다. 

플라자 합의는 환율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이후 달러는 장기간 약세를 보였고 엔화는 초강세를 보였다. 일본 기업들의 수출은 타격을 받았지만 미국 기업들은 달러 약세 속에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자금은 해외로 향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반면 미국 경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체력을 회복했고 인터넷 산업이 급부상하며 장기 호황을 누려왔다. 비록 2008년 금융위기가 있었지만 달러는 위기때마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됐다. 저물가 시대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금리를 낮게 유지했고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도 이뤘다.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사태는 잠시 달러의 위상을 흔드는 듯했다.  투자자들은 달러를 사들였다. 달러만큼 믿을 만한 자산이 없다는 신뢰가 근간이었다. 그래도 연준의 초저금리 정책 탓에 워낙 많은 달러가 시중에 풀리다 보니 최근 같은 달러 강세를 생각할 수 없었다.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는 2021년 초 5월경에는 전년 대비 10%나 하락했다. 그때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인플레이션이 치솟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은 금리 결정의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연 2%의 인플레이션 달성을 위해 고민하던 연준이 이제는 8%대 후반의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인상 시기를 실기했다는 후회탓일까. 연준은 ‘빅스텝’(0.50%포인트)과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이라는 거침없는 행보에 나섰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연준의 안일한 판단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연준이 빠르게 경기 부양 대신 인플레이션 차단에 방점을 두었다면 지금과 같은 급격한 금리 인상은 없었을 수 있다. 

환시장의 영향도 덜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의 부작용은 미국 밖에서 벌어진다. 미국은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과 금융업이 발달했다. 전 세계 발전을 주도한 빅테크들도 대부분 미국에 있다. 

이렇다 보니 주요 물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미국 내 생산의 필요성이 강조되지만 여전히 미국은 수입이 중요하다. 그런데 달러값이 역대 최고치로 치솟는 상황은 인플레이션과 맞물린다. 수요둔화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달러 값이 오르기 마련이다. 제로금리 여파로 해외로 이동했던 달러가 높은 금리를 찾아 미국으로 회귀 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소비자에는 호재다. 수입품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기업 이익이 줄어들 수 있음에도 경기보다는 인플레이션 차단이 절실하기에 미국 정부도 달러 강세를 용인할 수밖에 없다. 플라자 합의 당시와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국가 통화들이 달러 대비 절하되고 있다. 우리 원화값도 내렸지만 더욱 눈여겨볼 점은 주요 기축통화들의 추락이다. 

2000년대 초 유럽연합(EU) 출범을 계기로 달러의 맞수로 떠올랐던 유로는 사상 최저 수준이다.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1달러당 1유로라는 저점도 무너졌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 21일(현지시간) 10년 만에 0.5%포인트 금리 인상을 결정한 것은 달러 강세를 견제하기 위한 화폐 전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ECB는 지난달 예고했던 금인 인상 규모를 배로 늘렸다. 미국 연준이 두 차례 연속 자이언트스텝 금리 인상을 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금리 인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셈이다.

그럼에도 유로가 여전히 달러의 강세를 차단하기는 역부족이다. 마침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가 사임한 이탈리아 정국의 혼란사태가 불거진 것도 유로화에 악재다.  

마이너스 금리에도 불구하고 달러대비 강세를 보였던 유로화는 과거는 이제 추억일 뿐이다. ECB가 금리 인상에 나섰지만 여전히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힘을 쓰지 못하는 현상을 뒤집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엔화의 상황은 더욱 충격적이다. 연초 달러당 115엔이었던 엔화 환율은 139엔까지 치솟았다. 일본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확장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마침 일본의 결정이 ECB와 같은 날 내려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의 입장은 확고하다.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수출을 늘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막대한 정부 부채의 부담 확대에 대한 부담도 덜었다. 수입물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정도는 정면돌파 하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드러났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움직였다면 환율 조작 논란이 벌어지겠지만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인 만큼 미국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중국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하는 미국이 일본의 경제 회복을 위해 엔저를 용인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제기된다. 엔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달라진다면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재무부는 매년 두 차례 환율 보고서를 통해 각국의 환율 정책을 분석한다. 인위적으로 환 시장에 개입하는 국가에는 환율 조작국으로 규정해 제한을 가한다. 최근의 상황은 이런 미국의 정책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부터 자국 경제를 위해 지금의 위기를 자초한 마당에 타국의 환율 방어조치에 문제가 있다고 제기할 근거가 약해졌다.

달러가 부족한 신흥국들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 급등 상황에서 신흥국이나 후진국은 달러 유출이 벌어질 경우 대응이 어렵다. 과거에도 미국 금리가 인상할 때마다 신흥국 경제 위기와 통화가치 하락 현상이 이어져왔다. 세계적인 경제 혼란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물가를 잡기 위해 자국 통화를 스스로 평가절상하는 이번 ‘역환율’ 전쟁도 영원할 수 없다. 당장 금리 상승으로 경기가 추락할 경우 연준 등 중앙은행들은 금리인하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룬다. 연준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금리 인하를 시작할 것이라는 월가의 전망도 적지 않다. ECB 역시 같은 길을 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금융시장에 대한 예측이 달라지고 변화도 순식간에 이뤄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코로나19 이후 경제와 금융환경 정상화 과정은 상당히 긴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