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2009년 10월 31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2009년 10월 31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 이상 이어지던 냉전 시대를 끝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사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6개월을 넘기며 전 세계가 신냉전의 신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전해진 고르바초프의 사망 소식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에 대한 미·중·러의 평가는  ‘바이든-푸틴-시진핑’이 주도하는 신냉전의 시대가 더욱 본격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

고르바초프만큼 동서 간에 엇갈린 평가가 나오는 이도 드물다.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에서는 냉전을 끝내고 세계평화 시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이 붙는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없었다면 지금도 폴란드, 헝가리와 같은 옛 소련 위성 공산국가가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을까. 

냉전 종식 후 일부 과도기가 있었지만, 세계 각국이 안정되게 성장한 것을 고려하면 전 세계에 미친 고르바초프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냉전 종식을 이끌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에게 서방세계가 긍정적 평가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사망을 추모하면 발표한 성명은 마치 과거 냉전 시대를 되돌리려는 푸틴에 대한 경고로 불릴 만큼 고르바초프를 치켜세운다. 바이든 대통령은 "수십 년간의 잔인한 정치적 억압 이후 그는 민주주의 개혁을 받아들였다"라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단순 강령이 아닌 오랜 기간 고립과 박탈을 겪은 소련 국민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라고 했다.

바이든은 “고르바초프가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는 상상력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경력을 걸고 용기를 낸 보기 드문 지도자이며 그 덕분에 수백만 명이 더 안전한 세상과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라고 평했다. 고르바초프를 애도하며 조목조목 푸틴을 겨냥해 비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고르바초프는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수교를 결정했던 만큼 우리 정부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과 러시아 간 우호 협력 관계의 확고한 틀을 마련한 선구자"라면서 "고인의 결단과 지도력, 자유의 유산을 오래 기억하고 지켜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과 맞서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은 미묘하다. 푸틴 대통령은 성명에서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인이었다"라면서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깊이 이해했고,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평가했다. 

담담한 언급이지만 실제 행동과는 다르다. 푸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해체해 왔다. 고르바초프 장례식에도 불참한 푸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지우기를 더욱 가속할 것으로 보인다. 크렘린궁의 성명은 더욱 거셌다. 크렘린궁은 고르바초프가 냉전 종식을 주도한 비범한 세계적 정치가였지만 피에 굶주린 서방과의 화해 전망에 대해 매우 틀린 판단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 평가는 푸틴 대통령이 현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푸틴은 과거에도 고르바초프가 유도한 소련의 붕괴가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자 진정한 비극이며 이를 되돌려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그 시발점이 우크라이나 전쟁일 수 있다.

러시아 주요 인사들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 푸틴 대통령의 측근 세르게이 나르쉬킨 대외정보국장이 "어려운 시기 국가를 이끌 책임이 그에게 있었지만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정의 러시아당'의 세르게이 미로노프 당수도 "소련 국민에게 그는 희망이 됐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라며 "우리는 훌륭한 나라를 잃었고, 무질서가 질서를 대체했다. 오늘 우리는 고르바초프의 실수를 바로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금 푸틴과 러시아가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보여준다. 고르바초프가 터를 닦은 세계 공존의 시대를 자국 주도의 시대로 바꾸려는 의도가 읽힌다.

중국 역시 중러 관계 개선을 이끈 고르바초프에 대한 애도보다는 소련이 누렸던 위상을 서방에 내준 정치인으로 보고 있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을 앞둔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추구하는 중국은 소련의 영향력을 미국에 내준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성명 대신 기자의 질문을 받고서야 "고르바초프 선생은 이전에 중국·소련 관계 정상화를 추동하기 위해 긍정적인 공헌을 했다"라며 애도를 표했다. 고르르바초프 집권 이전 같은 공산 진영이면서도 갈등했던 양국 관계를 개선한 장본인에 대한 평가로는 극히 박한 내용이다. 

이는 중국 정부가 먼저 나서 고르바초프의 사망을 드러내고 애도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중국 언론은 더욱더 공격적이다. 

글로벌타임스는 관측통을 인용해 고르바초프가 원칙 없이 미국과 서방에 영합해 국제 정세 판단에서 심각한 실수를 하고 국내 경제에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다른 나라들에 서방의 '평화적 발전' 시도를 경계하게 한 비극적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를 두고 중국 정부가 언론을 통해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고르바초프가 맹목적으로 서방 시스템을 숭배함으로써 옛 소련의 자주성을 상실케 했고, 그로 인해 러시아인들이 정치적 불안정과 심각한 경제적 고난을 겪은 것은 중국이 취해야 할 경고이자 교훈이라고 전했다. 이는 중국이 러시아의 전철을 밟지 않고 시 주석의 주도하에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예고나 다름없다.

곧 끝날 것이라던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6개월을 넘겼다. 미국은 러시아가 곧 굴복할 것이라며 경제 제재로 맞섰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푸틴이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겨울을 앞두고 러시아산 가스로 유럽을 옥죄는 푸틴의 위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중국도 10월 16일 ‘제20차 전국 대표대회’(20차 당 대회)를 열고 시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할 것이 확실하다. 

반면 바이든의 위상은 위태하다. 11월 중간선거에서 패하면 레임덕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전제주의를 앞세우는 지도자들의 부상과 민주 진영 맏형의 위기 속에 올겨울 국제정세는 더욱 거센 찬바람이 불 전망이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