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칼럼

한국에는 지배주주들이 있으니 이들이 먼저 전문경영진 성과 평가 잣대에 ESG를 넣어야 한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한국에는 지배주주들이 있으니 이들이 먼저 전문경영진 성과 평가 잣대에 ESG를 넣어야 한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최근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저자는 선진국의 특징 몇 가지를 적고 있는데, 그 중 선진국일수록 ‘정의(definition·定義)를 잘 내린다’고 한다. 선진국에서는 새로운 어젠다나 이슈가 등장하면, 먼저 그 개념에 대해 충분히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 이후엔 그 어젠다를 속도감 있게 추진해 확산시킨다. 그의 말을 더 들어 보자. 

“한국은 세계 최고의 후발 추격국이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미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았다. 여기서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어떻게’뿐이었다. 정답은 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왜’라고 물어본 적 없이 수십 년을 ‘어떻게’만을 풀며 여기까지 왔다.”

예컨대 ‘4차산업혁명위원회’ 홈페이지를 가 봐도 ‘4차산업혁명’에 대해,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설명이 없다고 한다. 4차산업혁명의 정의조차 없으니 관련 이해관계자들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정의를 내린다. 

‘동상이몽’일 수밖에 없다. 각기 다른 꿈을 꾸니, 합력해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4차산업혁명’은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에서 출발했다. 이는 독일 정부 주도 하에 2년간 사회적 대토론의 결과물이었다. 지루한 과정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지난 1년여 우리 사회에 몰아 닥친 환경·사회·지배구조(ESG)는 어떠한가. 우리는 ESG 개념의 컨센서스를 위해 얼마나 머리를 맞댔을까. 이런 물음이 떠오르자 필자는 ‘느닷없이 ESG’란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SG가 ’무엇이고‘ ’왜‘ 지금 그것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백가쟁명식 혼란 때문이다. 합의된 정의의 부재 때문이다. 이는 ‘4차산업혁명’ 논의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이익과 이해 수준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ESG 정의를 내리고, 제각각의 길을 가면, ESG의 사상누각을 쌓는 것이다. ESG 전문가들의 ‘셀프 워싱’도 심각하다. 기업들에게만 ESG 워싱을 놓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 스스로의 워싱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한다. ‘전문가’란 한 우물과 외길에 최소 1만시간 이상을 투자한 사람이 아닐까. 

다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겠다. ESG가 무엇인가? ESG가 왜 지금 시점에 등장했는가? 그 배경은 무엇인가?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천착이 쉽지 않다. 그러니 답하고자 한다. ESG 등장의 근인(近因)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탐욕적이라 지탄받았던 금융기관들의 고해성사였고, 원인(遠因)은 현대 회계 제도에 대한 투자자의 불평불만에서였다. 

현대 회계제도는 1929년 대공항를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1930년 때부터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인회계사협회(AICPA) 등 미국의 관련 기관들을 중심으로 현대 회계이론, 제도 등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구식이고 올드 패션이다. 그 사이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를 거쳐, 이제는 지식, 데이터, 플랫폼, 탄소 자본주의로 전환됐는데도, 여전히 현대 회계제도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현대 회계가 아니라 전근대 회계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투자자와 기업들은 전근대적 재무제표와 각종 경제적 모델을 주로 사용해 기업을 평가하고 투자해 왔다. 여기서 기업의 환경, 사회적 요소는 단순히 외부성(Externality)으로 간과됐고, 드물게 각주 처리하는 수준에 그쳤다. 

예컨대 요즘 기업들은 유형자산에서 벗어나, 무형자산, 인적 자본 의존도가 높은 사업모델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현행 회계기준 상으로는 연구개발, 브랜드 가치, 인적 자본, 이해관계자 관계관리 등을 위한 지출이 자산계정이 아닌 당기 비용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 분야에 치중하는 기업일수록 성장 잠재력이 높음에도, 오히려 적자 기업이나 수익성이 낮은 기업으로 평가를 받아 자본조달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역설이 발생한다. 한편 기후변화가 메가 어젠다로 등장하면서, 화석연료 자산은 좌초자산임에도 재무제표는 그 위험을 알려 주지 않는다. 

글을 맺겠다. ESG 주류화의 배경은 금융위기에 대한 통렬한 반성, 경제 패러다임 시프트에 따른 투자잣대의 변화다. 글로벌 연기금 등이 그 선봉에 섰다. 블랙락 같은 자산운용사가 그에 호응했고, 기업들은 돈줄을 쥔 금융기관들 변화에 편승해야 했다. 

‘글로벌 연기금으로부터 기업까지’ ESG의 낙수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기업은 오너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안 바뀐다. 주식 소유가 널리 분산된 영미권 기업들의 오너는 기관투자자들이다. 이들이 ESG를 투자의 잣대로 도입하니 기업들도 도입했다. 이것이 영미권의 ESG 발전경로이자 성공문법이다. 

우리도 여기서 레슨을 얻어야 한다. 즉 기업의 오너인 주주들부터 바뀌어야 한다. 한국에는 지배주주들이 있으니 이들이 먼저 전문경영진의 성과 평가 잣대에 ESG를 넣어야 한다. 국민연금 등의 주주들도 그 투자 잣대에 ESG를 깊이 심어야 한다. 이렇게 기업 오너인 주주들이 ESG를 수용해야 경영진도 수용한다. 이것이 ESG다. 이 메커니즘이 구축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ESG는 그 바람과 함께 곧 사라질 것이다. 

●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프로필

KAIST 경영대학원 대우교수와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과 (사)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 고객사에 ESG 분석과 운용 전략을 자문하는 ESG 전문 리서치 회사 ㈜서스틴베스트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형 사회책임투자> 등이 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weeklyh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