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보(半步) 우클릭하며 대한민국에 던진 경고 “감내해야 한다”
로컬 통계 착시로 물가상승률 적게 보이고 성장률 하락 현실화
한미 금리 역전해도 금리 빠르게 올리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지난 21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임명장을 받고 27대 한국은행 총재에 취임했다. 전날 이뤄진 인사청문회에서도 여야 간 별 충돌 없이 정책질의 위주의 검증이 이뤄졌다. 보기 드문 청문회였다. 이 후보자는 역대 총재 누구보다 소신 있는 통화정책을 펼 기회를 얻었다.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졌다.

어느 때보다 우리의 경제 상황이 엄중해서다. 이날 이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전보단 반보(半步) 오른쪽으로 움직인 것 같다고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이주열 전 총재의 금융통화위원회가 물가와 금융 불균형을 중시했다면, 이 총재는 성장과 물가를 균형 있게 본다고 말해, 덜 매파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19일 오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실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19일 오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실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주원인은 지목하지 않았다

이 총재는 인사청문회에서 물가상승 원인으로 공급 쪽 요인을 먼저 얘기했다. 2년여간의 코로나 팬데믹을 이유로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공급망) 문제를 제기했다. 수요 쪽에선 재정지출을 지목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나면 그동안 못 쓴 소비가 늘어 인플레이션이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은으로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금리 인상을 통해 (물가를) 잡으려고 신호를 주지 않으면 기대심리가 작용해 인플레이션이 더 올라갈 수 있으니, 선제적으로 금리 시그널을 줘 기대심리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가는 것이 지금까지는 맞는다고 본다.” 이 총재의 말 그대로다.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는 신호이면서 ‘언제까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4월, 5월 통계를 보면서 판단하겠다고도 했다. 다달이 살얼음이라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최근 국내 물가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요인은 전 세계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실제로 미국 노동부는 12일(현지 시간) 미국의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5% 올랐다고 밝혔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8%대 돌파는 41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그동안 세계 주요 국가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소비자물가 수준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 올랐다. 시장 예상치(1.2%)를 크게 웃돌았다. 4개월간 이어온 내림세도 멈췄다.

◇물가 통계에 뻥뻥 뚫린 구멍…‘물가 통계보다 훨씬 높다’ 대세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 3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4.1% 상승이다. 1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그러나 이 숫자는 현실과 괴리가 크다는 평가가 많다. 우리나라 물가 통계에는 가계 경제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값이 빠져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 사실상 식비에 해당하는 음식 배달료도 그렇다. 미국은 집값도 환산해 소비자물가에 반영한다. 우버 등 승차 공유서비스 가격도 몇 년 전 추가했다. 우리나라도 5년, 10년 주기로 통계에 반영할 항목을 재정비하긴 한다. 그러나 실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실제보다 항상 낮은 수치를 보여준다는 비판이 많다.

정부와 정치권, 한은 모두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얘기한다. 물가가 오르면 가만히 앉아서 세금을 더 내는 꼴이다. 화폐 가치가 하락해 같은 돈으로 상품 교환을 덜 할 수밖에 없어서다. 우리나라의 이런 로컬 물가 통계는 인위적으로 물가가 낮아 보이게 한다. 이는 물가 관리를 제1 목표로 둔 한은의 책임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미국과는 조금 다르게 중국의 성장률이 곤두박질친 것도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 비중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도 높아졌다. 수출입 모두 1위 상대국이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의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4.8%에 머물렀다. 연간 성장률 목표인 5.5%에 크게 못 미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계 경제가 경기 침체 속에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코로나19 여파에서 빠져나오는 세계 경제의 회복세를 둔화시킬 수 있다”며 “성장 둔화와 인플레이션이라는 두 가지 위험이 올해를 같이할 것”이라고 지난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서울=연합뉴스) 21일 오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이창용 한국은행 신임 총재 취임식에서 이 총재가 취임사를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21일 오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이창용 한국은행 신임 총재 취임식에서 이 총재가 취임사를 하고 있다. 

 

◇ 중국 무역 비중 큰 한국…성장 전망도 암울

국제통화기금(IMF)은 19일(현지시간) 발표한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기존 3.0%에서 2.5%로 낮췄다. 현재 우리 정부는 3.1%, 한국은행은 3.0%의 성장률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정부와 한국은행의 성장률 전망도 수정 전망을 통해 내려갈 것이 자명하다.

민간 연구자들은 더 암울한 얘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11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에서 바른사회운동연합(상임대표 신영무 변호사)이 주최한 ‘새 정부의 나아갈 길’ 심포지엄에서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우리나라의 ‘장기 성장률’은 5년마다 1%포인트씩 하락했다”며 “이 추세라면 다음 달 출범하는 새 정부에서 장기 성장률이 0%대로 주저앉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연간 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역성장이 2년에 한 번꼴로 발생할 수 있다”며 “‘5년 1% 하락’의 법칙을 깨고 ‘제로 성장’을 저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이 후보자가 반보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성장’을 주요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 총재는 인사청문회에서 “성장에 문제가 없는 한, 그 방향(금리 인상)으로 가야 한다”고도 했다. 성장에 문제가 생기면 적절한 시기에 금리에 올리지 못할 수 있고, 이는 한미 금리 역전과 심화에 이어 ‘감내해야 할 과제’가 된다.

이 총재의 어깨엔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이 올라탔다. 통계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보는 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는 성장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이 총재도 이미 그걸 느끼고 있다.

[☞용어 설명] 통화정책에서의 매파(hawk)와 비둘기파(dove) : 중장기 인플레이션 관점에 좀 더 역점을 두고 긴축적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하려는 입장을 매파로 부른다. 경제 성장세 확대·유지 필요성에 치중해 좀 더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하고자 하는 견해를 비둘기파로 분류한다.


김병수 기자 bskim@hankooki.com